오늘 카페 플레이버는 모처럼 한산했다. 아주 오붓한 기분이어서 블로그에 플레이버 이야기를 쓰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기분은 얼마 안 있어 들어온 아이들때문에 곧 깨어지고 말았는데, 뭐 손님들 탓이니 카페 입장에서는 잘못한 게 없다. 다만 들어오는 손님들의 분위기가 카페의 분위기를 좌우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엔 카페 분위기가 구렸다.. 라고 절충하면 될 듯 싶다. 뒷다마를 사랑하는 나지만 그 아이들이 보인 작태에 대해선 굳이 말하고 싶은 기분은 없다. 다만 몰상식했으며, 아주 역겨웠다고 해두도록 하자. 


그냥 이번 주 내내 했던 생각들이 그 아이들로 인해 강해졌고 그것에 대해서 짤막하게 말하고 싶다. 이 블로그 분위기는 제법 김뭐시기라는 나의 이름에서 벗어나있으니 오히려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듯 싶다. 이번 여름의 고민들은 3주 전 만났던 선배와의 면담을 통해서 비교적 명쾌하게 정리되었다. 내 대학원 생활 3년간을 계속 사로잡았던 불안과 걱정들에 대해서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선배에게는 정말 무한한 감사의 마음뿐이다. 


나는 너무 성급했고, 내 욕심은 내 꿈을 설익은 상태에서 빨리 꺼내먹고 싶어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은 나를 닦달했다. 가족을 나는 사랑하지만, 먼훗날 내가 쓸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글에서 내게 가족이 준 도움은 아주 기초적인 것밖에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요 몇년동안, 길게 봐서는 10년 정도의 세월동안 나는 궁핍했고 좀 딱하고 찌질한 사정이었는데, 집안에서는 내 그런 사정을 이용해 자꾸 내 진로를 정하고자 했다. 가족관계란게 단순히 물질적인 부분만을 볼 수는 없고 감정이나 이런저런 측면들을 다 고려해야 하지만, 그런 것들을 죄다 고려해도 나는 드잡이질을 당했고 그것을 망각하거나 용서할 마음은 없다. 사랑하지만, 불의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불의에 굽힐 마음은 없다. 


이래저래 나는 떠날 작정이다. 아니 떠나야만 할 것이다. 오늘 마주친 머저리같은 친구들은 내 확신을 강화해줬다. 내게 충고를 해준 선배는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것,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할 것을 주문했는데, 오늘 만났던 그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지적인 삶'에 대한 꿈을 다시 한 번 더 떠올릴 수 있었다. 가족, 행복, 믿음 등등 삶에서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치들이 있겠지만 그것들을 모조리 가질 수는 없고 결국 선택해야한다. 그렇게 선택을 한다면 그 선택에 대해선 적어도 나는 어떤 죄책감이나 후회를 느끼지 않아야 하리라. 나는 지적인 삶과 내밀한 사랑을 꿈꾼다. 머저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우리 집이 그런 분위기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떠날 수 밖에. 이 도시에 그런 공간이 없다면 떠날 수 밖에.


정말이지, 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했다. 아니 어떤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유부단하게 그것들이 나를 등지도록 유도했고, 때로는 알면서도 배신당했다(이렇게 이야기하면 욕을 먹겠지만). 그러나 그 모든 행동에는 어떤 결의도 없었고 어떤 단호함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단호해져야할 때가 찾아온 것 같다. 



q. 모든 현실을 연속성과 우연성 속에서 포착하려는 사람은 어디에 발을 두고 그 흐름을 바라볼 수 있을까. 지속적이고 고정된 하나의 기반이 없다면 말이다. 

a. (듀이에 따르자면) 그 과정에 들어가지 않고는 연속성과 우연성을 구체적으로 포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질문의 전제는 틀린 셈이다. 



비는 내리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살 걱정만 가득. 

올봄부터는 휘트먼의 시를 읽기로 했는데, 이게 참 좋다.

오늘 본 건 짤막한 시구니까 잠깐 같이 보고 가자.  


Life and Death


The two old, simple problems ever intertwined, 
Close home, elusive, present, baffled, grappled. 
By each successive age insoluble, pass'd on, 
To ours to-day--and we pass on the s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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