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D형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오늘은 D형의 이야기가 문득 생각났다. 이왕 생각난 김에 일종의 회상을 여기에 끄적거려보고 싶다. 사실 이렇게 D라고 지칭하는 것도 그 시절에 자주 했던 장난질이기도 하다. 

 이건 다름아닌 내가 D형에게서 마지막으로 본 천진난만한 사랑이야기이다. 지금의 D형은 다시는 그런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형을 본 지도 꽤 되었지만 내가 형을 봤던 시기의 모습들을 생각해보면 형이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진 않을 것이며, 혹은 그런 실수를 했다고 해도 그건 실수보다는 장난에 가까우리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시시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많은 사건들이 필요하지는 않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통한 적정한 시간의 공존이면 어느 짝이 맺어진다. 물론 이 공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그러면 쓸데없이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소통에 대한 이론을 펼쳐야하니까 생략하도록 한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정도의 자연적인 힘이 존재한다, 이 정도로 만족해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마 그 형이 C를 만난 건  봄날이었던 것 같다. 봄날은 앞서 말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아주 잘 들어맞는 조건이다. 이루어질 짝이라면 2월의 삭풍과 8월의 찜탕 속에서도 이루어지겠지만, 봄날엔 그래도 그 이루어질 짝이 더 잘 이루어지는 건 사실이다. 형이 좋아했던 C라는 아이는 머리는 좀 컸지만 그래도 못나진 않았고, 또 까칠했지만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아이였다. 더 정확히는 그 까칠함이 그 아이의 매력이었다.

 까칠함이 어떻게 매력이 될 수 있는가. 그 아이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 아이의 까칠함은 연약함을 감추려는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C는 상당히 엄격한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왔는데 그런 아이들에게서 예상할 수 있는 반강제적인, 그러나 바깥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순종적인 종교생활을 해오던 아이였다. 당연히 C의 대학생활은 불합리한 가정과의 마찰로 점철되어 있었다. C가 보여주었던 까칠하면서도 때론 도발적인 언행은 그녀의 통금시간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맥주를 좋아하고, 늘 욕을 섞어서 쓰고 껄껄 웃던 C가 통금시간이면 집에 들어가고 주일성수를 한다는 모순적인 사실이 남자들이 그녀에게 양가적인 기대를 품게 만드는 원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양가적인 기대란 발랑 까졌으면서도 내 앞에선 순하고 여성적인 여인에 대한 기대이다. 아주 흔한 판타지지만, 그게 그렇게 흔할 수 있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그 이유를 나는 잘 모르지만, 여튼 그런 판타지에 부합하는 C가 제법 인기가 많았다는 사실을 나는 증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엄연히 판타지에 불과한데, 나는 그런 야누스적인 매력은 수동성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다시 D형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형이 C에게서 매력을 느꼈던 그날들에 내게 말해준 C의 매력은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점이었다. D형은 아마 그 때가 내 나이 정도였을텐데, 서른 즈음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연애에서는 노병 수준의, 아니 연애 자체를 은퇴할 것 같았던 사람이었다. 외모에 대한 기준이 명확했던 D형에게 C는 만족스럽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형을 녹일만한 문장력을 C는 가지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넌 문장이 딸려 새끼야"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아주 여러가지 측면에서 볼 때 형은 C에게는 과분한 사람, 아니 나는 형이 C를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지금까지 쓴 게 아쉽지만, 둘의 사랑은 오래가지는 못 했다. 나는 결국 C의 수동성이 일을 그르쳤다고 보는데, C는 D라는 매혹적인 여행자에게 솔깃했지만 문지방은 나오고 싫었기 때문이다. D는 다음날 마을 공터앞에서 둘만의 여행을 떠나고자 했지만, 결국 바람을 맞고 말았다. 물론 나에게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D가 C보다는 중요한 관계이기 때문에 내가 편파적으로 기술했을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결국 D에 관련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전체 맥락을 고려해서 나의 편파적인 기술을 용서하기를 바란다. C도, 그리고 D도. 

 난 D에게 많은 빈틈을 보였고, 많은 실수를 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아주 부실한 사람이었던 반면에, D는 지금 떠올려보면 조금 미숙한 부분은 있었지만 여튼 나보다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그런 빈틈을 보였다는 게 놀라웠다. D는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난 그가 진심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습게도 말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만났고, 연애에 대해서 지극히 조숙했으며, 빈틈없이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던 C에 빠졌고 그것때문에 힘들어했다니. 꼭 그럴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곰씹으면 곰씹을수록 그게 얼마나 희박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사건이었나 생각하면 놀라울 다름이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같은 사람이 썼다고 믿겨지지 않는 저질스러운 팸플릿을 보는 것처럼.

 모르겠다. 그냥 그 형도 어렸고 나도 어렸고 C도 어렸다고 생각하면 편할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에 이렇게 찌끄리려고 할 때 마음에 담아두었던 결론도 그것에 가깝다. 아마 이제 D형은 그런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D라는 사람과 C라는 사람이 만날 그런 요상한 일은 내 기억에만 있으리라고. 계속 계절이 변한다고 중얼거리던 내가 오늘 느끼던 생각도 그렇다고. 나도 D처럼 그렇게 지난 날 저질렀던 바보같은 짓들은 다시는 안 하는 사람이 되리라고. 그런데 뭔가 뒷맛이 씁쓸하다. 다 쓰고 나니. 결론이 이래야만 하나? D형은 확실히 무의미한 짓거리들과 재미없는 문장들을 잘 골라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 또한 그처럼 그런 분별력을 가지게 되리라고, 그리하여 D형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쓸데없는 짓거리들로부터 떠난 사람이 되리라고, 그런 결론을 쓰고 싶었는데 뒷맛이 쌉싸름하다. 

 결론이라기엔 뭐하지만, 뭐 우리가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먼 미래에도 우리는 다시 이 때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에 쓸데없는 생각을 줄이고 잠을 청하는 게 더 유익하겠다. 오래전이었으면 A도 나오고 D도 나오고 I도 나오고 뭐시기도 다 나오는 그런 글을 썼겠지만, 지금 다시 해보니 썩 재미있지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