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흥미로운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도,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그리스도인이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괜찮은 이유를 제시해주고 있나 제목을 보고 궁금했던 책이다. 총신대에서 사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교재에 나오는 인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서술덕분에 우리는 설교대에서 이런 말을 많이 들어왔다. 인본주의, 다원주의 등등이라 저질이다 등등…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툭 까놓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들은 인문학이 무엇인지 알까? 인문학이란 게 하나로 퉁칠 수 있는 대상인가?

내용에 대해서 아주 투박하게 설명하기 전에 이 책의 장점에 대해 말하자면 꽤 친절하고 간략하게 신학사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인 김용규 교수는 2천년의 신학사를 인문학과의 관계 속에서 간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들의 교의학이 그려내는 자화상과는 다르게 우리 시대의 신학은 계시로부터 뙇 등장하고 있는 게 아니라, 공시적으로 통시적으로 세상 철학과 많은 관계를 가지며 2천년의 시간을 거쳐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을 보면 그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성공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문학과 신학이 둘 다 필요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위험사회유동하는 공포가 등장한다(개인적으로 이 포인트가 제일 좋았다). 주요한 논점은 인문학은 사실 기독교의 본질을 이루고 있으며, 그 본질은 기독교가 세상에 뿌리내리고 사역할 수 있게끔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경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자면 저자는 먼저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scientia prima)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세속적 세상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가장 높은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요컨대 다른 어떤 학문보다 드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다른 어떤 학문보다 폭넓은 가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학문이 그 바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인문학에 대해 알아야 하는가? 기독교 신학이 서양 인문학의(특히 철학)에게서 피와 살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고대 신학은 플라톤주의, 중세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 철학의 도움을 받았고, 근세에는 개혁신학이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 이름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자유주의 사회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의식하지 못할 지는 몰라도) 다양한 당대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저자는 책의 60페이지까지 친절하게 각각의 시대에 기독교 신학이 어떤 철학 사조들의 영향을 받아왔는지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이어서 기독교 신학은 약 2천 년동안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신앙과 이성, 성서의 계시와 인문학이 빚어낸 아름답고 정신적 구조물이라 극찬한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학이 가지는 독창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현대(특히 한국의) 교의학은 기독교 신학에 피와 살을 제공해준 철학의 영향을 잊어버리고 부정한다. 그러나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독교 신학은 하늘을 향하면서 땅에 뿌리내린 나무이고, 인문학은 그것의 지주이다.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학은 그 자신이 계시에서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보겠지만, 사실 인문학, 서구 철학이 없었다면 현대의 기독교 신학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기독교에 있어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실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중 하나이다.

이 책의 2부에서 저자는 이 시대에 인문학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기독교적인 성찰을 제공해주는가를 보여주고 싶어하며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개념을 일례로 제시한다. 근대적 이성의 결과로 나타난 자본주의 사회와 첨단 과학은 끊임없는 성장을 위해 우리에게 불멸, 신성, 초인간을 약속하며 호모 데우스가 되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하라리에 따르면 그 결말은 극소수의 인간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을 통해 70억의 쓸모없는 인간들을 통제하는 극한의 시대이다. 왜 이런 파국의 시대를 우리가 맞이하게 되었는가? 저자는 니체를 빌어 신본주의적 가치들의 몰락과 인본주의적 가치의 물신화를 그 원인으로 지적한다. 계몽주의와 산업시대의 理神들을 지나, 도킨스 같은 (저질)진화론자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면 낙원이 도래했을까?

우리가 맞이하게 된 것은 총력전과 홀로코스트, 전체주의 사회, 체르노빌 등등 고삐 풀린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칼춤, 인간과 자연의 비가역적인 파괴였다. 바로 울리히 벡이 이야기한 위험사회로 우리는 진입하게 된 것이다. 신이 죽은 위치에서 근대적 이성이 생산해내는 위험들을 더 이상 이성적인 수단이나 방법으로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바우만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런 위험 속에서의 세계화란 근본적으로 달아날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철학에서 진행된 이성의 한계에 대한 고찰을 우리에게 제시해줌으로써 저자는 신으로의 요청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필한다. 무신론적 인본주의는 인간 그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안셀무스를 인용하며 저자는 신을 배제한 인간이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를 배제한,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종교와 이성이 그려왔던 거대한 그림을 포기하고 개개인의 작은 이야기에 집중함으로써, 이성의 간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심리, 성적 지향, 다문화 등등…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공하는 탈근대적 가치는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가?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저자가 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실을 등한시하는 일종의 레저일뿐이다. 현실에서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굶주리는데, 우리가 그런 현실을 등한시하고 개인의 심리, 성적 취양의 다양성 등등으로의 천착은 방조이자 더 큰 폭력이라는 게 저자의 의견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앞장서서 옹호하는 이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자본주의자들이고, 좌파 지식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 계몽과 혁명의 조건들을 파괴함으로써 자본주의에 일조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도 이성도 사라져버린 시대에 우리는 각자도생할 뿐이고, 높은 확률로 호모 유즈리스가 될 뿐이다.

이런 삶의 조건 속에서 기독교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는 종교로서, 희망과 혁명의 종교로 다시 등장한다. 철학이 이겨낼 수 없는 모순을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개념처럼 기독교적 사유는 통합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페리코레시스는 서로 대립하는 양자를 하나로 묶는 개념인데, 예를 들자면 셋이자 하나이고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아들인’, ‘참 하나님이자 인간인’ ‘성스러운 공동체이면서 죄인 공동체등등 서로 대립하는 가치들을 묶을 수 있는 힘이 기독교에는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절망적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가치의 추구와 구현이 필요하고 여기엔 당연히 기독교의 신본주의적 가치들이 복원되어야 한다. 동시에 신본주의적 가치들을 통해 인본주의적 가치들을 재생해서 온전한 가치를 정립해야 한다. 여지껏 그래왔듯이 기독교는 일종의 용광로로 시대마다 닥쳐오는 변화와 도전 속에서 인문학을 끌어안고 온전함을 만들어가야 한다. ‘온전함을 지향하는 신학은 당대의 인문학에 대해 열린 신학이어야 한다.

"… 모든 합의적인 논의, 즉 진리 탐구를 위해 바쳐진 모든 논의는 원리들, 사실상 윤리적인 원리들에 기초하고 있다. 나는 그것들 중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1. 오류가능성의 원리. 아마 내가 틀렸고 어쩌면 당신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모두 틀릴 수 있다.
2. 합리적 논의의 원리. 우리는 비판적으로 그리고 물론 논쟁 중에 있는 다양한(비판할 수 있는) 이론들을 가능한 한 개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시험할 필요가 있다. 
3. 진리 근접성의 원리. 우리는 거의 언제나 그런 비판적 논의들의 도움으로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항상 합의에 도달하지 않는 경우들에서도 우리의 이해를 개선할 수 있다.

이 세 원리들은 인식론적이며 동시에 또한 윤리적 원리들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여타의 다른 것들 중에서 이것들은 관용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너한테서 배울 수 있다면, 그리고 만약 내가 배우고자 한다면, 그러면 진리를 위해 나는 당신을 관대하게 대할 뿐만 아니라 당신을 가능한 동등한 자로 여길 것이다. 인류의 잠재적 통합이나 모든 인간의 잠재적 평등은 우리가 기꺼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선결조건들이다. 우리가 어떤 토론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원리는 더욱 중요하며, 심지어 그 논의가 합의에 이르지 않을 때라도 그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논의는 우리의 몇 가지 오류들에 대해 빛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크세노파네스:그의 위대함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 칼 포퍼

한참 벡이나 바우만을 읽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서 도서관에서 칼 포퍼를 빌렸다. 안산 중도에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조차도 없어서 주문했는데 의외로 『파르메니데스의 세계』가 있어서 빌릴 수 있었다. 이 책에서 포퍼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그리스 과학이 얼마나 창조적이고 위대했는지 감동적인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포퍼가 봤을 때 밀레토스 학파의 과학자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에 이르는 그리스 과학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물리학의 발견을 예견하고, 그 방향을 선결하고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관찰과 이론의 선후관계에서 당대의 경험주의자들은(물론 후기경험주의는 전혀 다르지만) 귀납적인 과정을 통해 이론이 성립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포퍼의 생각은 그것과는 달랐다. 포퍼는 사고(그러므로 전적으로 철학적이면서도, 삶과 유리되지 않은)를 통해 연역된 가설은 틀릴 수도 있지만, 중요한 점은 그것을 비판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진리에 다가가는 그 과정이 과학이라 생각했다. 그리스 과학자들이 위대했던 점은 “제자들에게 비판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학설의 대담한 변화가 금지되지 않는” 합리적인 전통을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포퍼에게 있어서 과학은 단순히 실증적인 도구라거나 게임(후기 경험주의에서의)이 아니라 합리적인 전통 그 자체였다.


먼저 밝히면 나는 믿음의 수준이 불가지론과 무신론 사이에 있는, 리츄얼에 대해서 많이 의식하면서 교회를 다니는 신자이다. 

신기하게도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를 보기 전에, 내가 두세달 간 열심히 읽었던 책이 벡의 《자기만의 신》이었다. 

벡에 대한 공부가 전무해서 정리를 해서 블로그에 올리긴 너무 힘들기도 하고 또 벡의 다른 책들을 막 보기 시작해서 벡에 대한 글은 먼 미래에나 쓸 수 있을듯 하다.

여튼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벡의 책과 도킨스의 책은 많은 정서상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물론 벡이 21세기고, 도킨스가 19세기. 

그러나 뒤에 쓰겠지만, 어떤 점에선 벡(그리고 바우만)의 종교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앞서가는지, 아니면 유럽이 아방가르드한건지 몰라도

미국이나 한국의 현실, 전장의 공기는 조금 더 도킨스의 정서가 사람들을 자극할 여지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아마 뒤지게 히트했겠지. 


책의 논지를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 이 책은 다소 정치적인(페미니스트들과 비슷한) "각성"을 주기 위한, 그러니까 계몽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① 이 책의 신은 불가지론 이신론보다는 인격신에 가까운 신을 다루고 있다(물론 도킨스는 불가지, 이신같은 입장도 마뜩잖아한다).

② 기독교의 여러 논증은 엉망진창에 거짓이다(폭로). 여기에서 주로 등장하는 데몬은 버트런드 러셀.

③ 그리고 자연과 도덕을 기독교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없다. 

④ 오히려, 과학(엄밀하게 말해선 도킨스의 진화생물학)이 자연과 도덕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⑤ 종교로부터의 해방!


우선 나는 이 글이 저널리즘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글이 논의될 수 있는 영역은 어디일까? 종교? 생물학? 사회학? 

만약 종교라면, 신학자들은 도킨스가 말하는 것처럼 진지한 논쟁을 거부할 것이다. 

생물학이라면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데, 중간에 신학자와의 토론을 거부하는 과학자의 모습처럼, 이런 주제를 진지하게 다룬다는 건 점잖치 않은 일이다. 

세 번째로 인문학이나 사회학에서 이 주제를 다룬다면, 음, 그냥 복고적인 세속주의자? 계몽주의의 한 징조로 이 글을 바라보겠지. 

이 역시 점잖치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학술장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폭넓고 점잖지 못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로버트 머튼이 말하는 과학장의 보편성같은 어떤 최종 심급이 있기 힘들다.  

게다가… 도킨스의 극단적인 사이언티즘(문자 그대로, 정확히 사이언티즘이다)은 듀이도 수용하기 힘든 수준이라…


도킨스가 취하고 있는 전략은 모던한 비판이론가의 그것과 같다. 

인식적인 우위로(놀랍게도 도덕에서도!) 무지몽매한 신자들을 일깨우는 것이다!!!!! 놀라움!!!


우선 과학이 신을 대체할 수 있을까?는 사회학의 200년 역사를 공부하시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무책임! 놀라움!)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내가 유신론을 옹호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도킨스의 도그매틱한 접근이 유신론의 그것과 무지무지 유사하다. 

도킨스가 진화생물학을 바탕으로 도덕을 설명하는 그 부분부터 이 책은 시망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도킨스의 진화생물학은 여러 분파 중 한 갈래에 불과하다…)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19

http://www.sciencetimes.co.kr/?news=%EC%82%AC%ED%9A%8C%EC%83%9D%EB%AC%BC%ED%95%99-%EC%9D%B4%EB%A1%A0%EC%9D%84-%EB%B9%84%ED%8C%90%ED%95%9C-%EC%B0%BD%EC%8B%9C%EC%9E%90

도킨스가 속한 진영의 입장과 그들의 현재는 이 기사를 한 번 읽어보도록 하자. 도킨스는 문화에 대해선 별도의 매커니즘을 adhocing하는 입장이기는 하다. 

도킨스는 계몽되지 못 했던 인간의 과거를 딛고 비환원적으로 가치세계의 매커니즘(매커니즘이라 쓰니 앞에 말과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모순적인 것은 생물학이 가치의 영역을 다룰 때, 그 영역은 호킹, 아인슈타인의 과학보다는 유신론으로 오염된 영역으로 떨어져버린다는 것…

호킨스는 자신의 입장이 철저하게 오염되지 않은,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웃긴 건 에드워드 윌슨은 호킨스를 또 인문학 놈팽이로 생각한다는거지…

(사회생물학에 대해선 폴 레비노의 <Artificialiry and enlightenment: from sociobiology to biosociality>가 재밌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나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이 책은(이건 도킨스가 밝히고 있는 바이다) 학술적인 엘리트가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무지몽매한 대중들을 위한 책이다. 

도킨스의 철학적 수준을 내가 알지 못 하지만, 이 책은 길게 봐야 20세기 초반 정도의 과학철학의 수준(러셀의 합리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포스트모던한 사람이라면 이 책과 기독교 서점에 가면 숱하게 있는 신앙서적과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는 못 할 것이다. 

결국 이런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신이냐? 아니면 유전자냐?

왜 양자택일이어야하지? (물론 도킨스는 자기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기에 나의 질문도 저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도킨스가 헛발을 디뎠다고 해서 유신론을 변호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책의 명성과 도킨스의 명성을 알고 이 책을 봤을 때 좀 실망스럽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