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롭지 않은 포스팅, 그러나 오랜만의 포스팅을 해야겠다. 

단문들이지만, 사실 단문 정도면 내 시시한 일상에는 충분한 의미부여가 가능하리라. 

우선, 아주 오랜만에 중앙도서관을 갔다.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다, 갈증을 채웠다. 

되게 쑥스러운 일인데, 난 울학교에 안나 "카레리나"를 검색해보고 아, 어떻게 학교 도서관에 안나 카레리나도 없을까 개탄스러워하며 안나 카레니나를 신청한 적이 있다. 

물론 여러분은 안나 카레리나가 아닌 카레니나만 쳐도 수두룩하게 나오는 목록들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여튼 그리하여 최신 번역판을 내가 신청한 바 있는데, 정작 그 신청한 책을 내가 빌리진 못 했고 방학이 된 지금 안나 카레니나 1권을 빌리기는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문과 학생 누구든 방학이 되면 뭔가 고전이든 소설이든, 아니면 고전소설이든 자기가 읽지 못 했던 어떤 책이 읽고 싶은 게 당연하니까.

그러나 안산 중앙도서관에 가면 그런 걱정은 덜어도 된다.


내가 아주 단순하게 잡은 안나 카레니나의 골조는 레빈과 키티의 순결한 사랑, 그리고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같은 사랑이라는 두 축이 교차되는 십자가이다.

무엇보다도 굉장히 신선하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역에서 만나는 장면이었다. 

하필이면 왜 역이었을까. 안나의 "예감"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촌스럽지 않고 너무나도 근사하고, 두근거렸다. 

안나가 브론스키를 보고 "하필이면"이라고 생각했던 것, 브론스키가 안나를 따라갔던 것, 그리고 그 이후의 전개들 모두다 단지 개연성있고 낭만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바로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해보자.

우선 내게 안나 카레니나를 소개해준 사람은 밀란 쿤데라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에서 소설적인 '인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철학이나 사회학이 아닌 오직 소설만이 밝혀줄 수 있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밝힌다'라는 말을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사용하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앎은 불, 혹은 빛으로 표현된다. 안나 카레니나와 레빈의 '빛'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을 보도록 하자.


(안나 카레니나가 기차에 올라타 소설을 읽는 장면 추가할 것)

그것은 가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기에게 삶과 인간관계의 의미를 드러내준 그 날카로운 빛 속에서 그 점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
'불가능해! 삶이 우리를 가르는 거야. 나는 그를 불행하게 만들고, 그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야. 그 사람이나 나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해.... "
… 그녀는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을 혐오스럽게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선명함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았으며, 그 선명함은 그녀를 기쁘게 했다. 
… '그래, 내가 어디에서 멈췄지? 인생이 고통이 아닐 수도 있는 상황을 생각할 수 없고, 우리 모두 고통을 겪기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을 기만하기 위한 수단을 고안하고 있다는 것에서 멈췄지. 하지만 진실을 안다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자기가 브론스키와 처음 만나던 날 기차에 치어 죽은 사람을 상기하고 지금 무어을 해야 할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급수탑에서 레일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빠르고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가 자기 옆을 지나가는 기차에 바짝 다가가 멈춰 섰다. 그녀는 객차의 아랫 부분, 나사와 연결부 그리고 천천히 구르고 있는 첫 번째 객차의 커다란 쇠바퀴를 보며 눈어림으로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의 중간 지점과 그 중간 지점이 자기 앞에 오는 순간을 재보려고 노력했다. 
'저기로!' 하고 그녀는 객차의 그림자와 침목 위에 흩뿌려진 석탄과 뒤섞인 모래를 응시하면서 중얼거렸다. '저기로, 바로 저 한가운데로, 그렇게 나는 그를 벌하고 모든 사람과 나로부터 벗어나는 거야.' 
 그녀는 한가운데가 자기와 나란히 된 첫째 차량으로 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손에서 내려놓으려 한 빨간 여행 가방이 그녀를 방해하여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중간 부분이 그녀를 지나갔다. 그래서 다음 차량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녀는 수영하려고 물속에 준비할 때 느꼈던 것과 유사한 감정에 사로잡혀 성호를 그었다. 성호를 긋는 익숙한 동작이 그녀의 마음속에 어린 시절과 처녀 시절의 갖가지 기억들을 불러냈고, 갑자기 그녀의 모든 것을 덮고 있던 어둠이 찢어졌다. 그리고 일순간 그때까지의 삶이 온갖 밝은 과거의 기쁨에 감싸여 그녀 눈앞에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가오는 두 번째 차량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바퀴와 바퀴 사이 한가운데가 그녀 앞에 이른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빨간 여행가방을 내던지고 머리를 어깨 사이로 움츠리고 양손을 짚고 차량 밑에 쓰러졌다. 그리고 가벼운 동작으로 마치 이내 일어날 준비를 하듯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기가 한 일에 전율했다. '내가 어디 있는 거야?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도대체 왜?' 그녀는 일어나 몸을 젖히고 싶었다. 그러나 무언가 거대한 것이 가차 없이 그녀의 머리를 치고 등을 끌고 갔다. '신이시여. 저의 모든 것을 용서해주세요!' 그녀는 저항이 불가능함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노인이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며 철로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불안, 기만, 괴로움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던 한 자루의 촛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밝게 타올라, 그녀에게 지금까지 어둠 속에 놓여 있던 모든 것을 비춰주다가 바지직거리며 어두워지더니 영원히 꺼져버렸다. 


톨스토이가 불안, 기만, 괴로움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이라 말한 것은 안나가 기차에서 소설을 읽는 장면과 쌍을 이룬다. 안나는 자신의 삶이라는 소설을 읽고 그 주인공을 되고 우리는 안나의 연구를 지켜본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는 레빈의 탐구 역시도 나타난다. 톨스토이가 명시하는 것처럼 레빈은 형의 죽음과 아들의 탄생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콘스탄틴 드미트리치, 미튜하(농부는 가옥 관리인을 경멸적으로 그렇게 불렀다)가 어떻게 이득을 안 볼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어떻게든 쥐어짜서 자기 몫을 챙기니까요. 그는 기독교 신자를 봐주지 않을 거예요. 포카니치 아저씨(그는 플라톤 노인을 그렇게 불렀다)는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짓은 하지 않아요. 그는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빚을 탕감해주기도 하지요. 그는 아무도 착취하지 않아요. 똑같은 사람이니까요." 
"그럼 무엇 때문에 그는 빚을 탕감해주지?"
"그거야, 사람도 여러 종류니까요. 미튜하처럼 자기 필요만을 위해 살고 자기 이속만 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포카니치처럼 정직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는 영혼을 위해 삽니다. 신의 뜻을 이해하는 거지요." 
"어떻게 신을 이해하지? 영혼을 위해 사는 게 어떤 거야?" 레빈은 거의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라니요? 뻔하지요, 신의 따라서죠 하지만 사람들은 가지가지입니다. 당신을 보면, 남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으시잖아요." 
"그래, 그렇지, 잘 가게!" 레빈은 흥분한 나머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자마자 지팡이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쁨이 레빈을 휩싸고 있었다. 포카니치가 신의 뜻에 따라 영혼을 위해 산다는 농민의 말을 듣자, 불분명하지만 의미심장한 생각이 지금까지 어딘가 닫혀 있던 데서 떼를 지어 뛰쳐나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그 자체의 빛으로 그를 눈멀게 하면서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감정은 내가 꿈꾸었던 것처럼 갑자기 나를 변화시키지도, 행복하게 해주지도, 밝게 비춰준 것도 아니다. 마치 아들에 대한 감정과도 같다. 또한 그 어떤 뜻밖의 선물도 아니다. 이것이 신앙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감정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내 영혼에 고통과 함께 들어와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반에게 화를 낼 것이고, 논쟁도 벌일 것이며, 마땅치 않은 때 내 의견을 표현할 것이다. 여전히 나의 가장 성스러운 영혼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심지어 내 아내와의 사에에도 벽이 존재할 것이며, 내가 느끼는 공포를 가지고 아내를 비난하고 그 때문에 후회를 할 것이다. 나는 또 여전히 왜 내가 기도하는지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해도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의 삶은, 나의 삶 전체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에 구애받음이 없이 매 순간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내 삶 속에 부여할 수 있는 선의 의의를 지니게 될 것이다!' 


 나는 이들의 탐구를 단순히 톨스토이의 탐구로 등치시키고 싶지는 않다. 물론 이 소설을 쓴 사람은 톨스토이다. 하지만 안나와 레빈 모두 충분히 살아숨쉬고 있지 않은가.. 너무 단정짓는 것같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밀란 쿤데라가 이야기하는 소설의 인식을 빛의 형이상학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궁극적으로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의 인생에서 아직 빛을 비추지 못했던 어두운 부분의 것이다. 그러나 빛은 찰나적이고 안나와 레빈은 그것에 대한 인상을 이해하고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그들은 행동한다. 안나는 온통 악과 가식으로 가득찬 세계를 발견했으며 그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쳤고, 레빈은 삶의 의미를 종교적인 사유와 휴머니스틱한 행위로 형성시켜나가고자 한다. 

한편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인식의 측면에서 대조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다못해 지식인인 세르게이조차도 그가 볼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 브론스키는 말할 것 없고, 오블론스키는 그 가능성을 탐구하지 않는다.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소설 내에선 비성찰적인 군상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민음사 판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책 표지 이쁘네…

 

지난주에는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를 읽었다. 이렇게 시작하니 무척이나 방학숙제 느낌이 나지만, 뭐 독후감이니까! 토마스 만 하면 마의 산도 유명하고 이런저런 소설들 다 유명하지만 파우스트 박사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전적으로 밀란 쿤데라의 추천 덕분이었다. 내가 작업하고 있는 논문의 주제가 학문과 문학의 경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밀란 쿤데라가 가장 철학적인 소설을 쓰려고 노력했다고 토마스 만을 평했을 때 나도 모르게 끌려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 추천사(?)는 굉장히 엄밀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파우스트 박사』가 다루고 있는 주제인 독일 문제는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더 내려가면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소급되는 아주 뿌리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가벼운 문제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토마스 만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온 하나의 민족, 문화, 문명에 대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은 신중하고 매우 무겁게, 그리고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이러한 경향의 소설은 토마스 만까지만 가능한 소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누가 민족과 문명의 운명에 대해서, 특히나 유럽에 대해서 새로운 글을 쓰겠는가. 오히려 민족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운 세계의 소설들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다.



토마스 만, 성격있게 생겼다.

 

우선 파우스트 박사를 다루기 위해 근대성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 철학자들에게 끊임없이 근대성이라는 주제는 변주되는데, 그것은 이런 3악장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분화되지 않은 세계의 총체성 → (도구적–주관적 이성의 발전) –탈주술화 → 세계의 분화, 총체성의 상실

독일의 늦은, 그러나 충격적인 근대화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총체성의 상실은 독일 지성사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였던 모양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티즘은 가톨릭에서 사제가 가지고 있던 은총과 구원의 매개로서의 역할을 제거하면서 논리적으로 구원의 문제를 윤리의 문제에서 분리시킨다. 토마스주의에 따라 신의 의지에 종사하던 이성은 더 이상은 신의 뜻을 살필 수 없게 되었고, 근대인들은 이제 다른 누구의 힘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와 금욕적인 생활로 알 수 없는 구원을 확신해야 하는 위치에 놓였다. 지성사적인 흐름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와 자본주의의 출현은 윤리와 도덕을 지탱하던 공동체의 총체성을 파괴했다. 더 이상 '신'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 윤리를 어떻게 보증할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칸트를 거치면서 윤리는 인식과 엄정하게 분리된다. 정언명령은 인식에서 벗어난 윤리를 구제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였다. 베버는 근대의 이런 흐름을 절망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정신과학 혹은 문화과학은 특정한 목적과 결과의 측면에서 합목적성을 분석하고 인식할 수는 있지만 그 목적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물리적 자연의 총체성은 이미 당대 과학의 패러다임이 된 자연과학의 결과로 해체되었고, 인간 자연의 총체성은 문화과학이 과학적인 방법론을 확립하든, 확립하지 못 하든 지켜내지 못할 것이었다. 카프카의 『성』은 여러 작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합리화된 근대, 총체성이 상실된 세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K는 이유도 모른 채로 재판에 회부되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아무도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말해주지 못 한다. K조차도 그 문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보인다. 아무 것도 인간에게 옳고 그름을 말해주지 않는다. 아니 말할 수 없다가 맞을 것이다.

총체성이 상실되어 버린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끊임없이 분화를 진행시키지만 일반적인 윤리는 제공할 수 없는 계산적인 이성이다. 주관적 이성, 도구적 이성, 여하튼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그것을 이제 파우스트 박사라는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악마성과 아주 직관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주인공인 레버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주관적이고 도구적인 합리성으로 인해 공동의 가치가 결핍되어 음악이, 더 나아가 예술 자체가 목적성을 상실해버린 시대이며 곰팡이가 슨 자유 속에서 불임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그는 잃어버린 총체성으로의 연결고리를 찾거나, 음악을 근거하려 한다. 『파우스트 박사』에 나오는 음악이론은 저자가 뒤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쇤베르크의 12음 이론을 따왔고, 또 동시에 아도르노의 음악이론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파우스트 박사에서 나타나는 아도르노 사상과의 관계는 김창준의 2002년 논문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와 아도르노의 음악철학"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논문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레버퀸의 음악은 끊임없이 음악의 근대적인 휴머니즘을 조롱하고 해체하면서 원시성으로 회귀한다. 그는 불안정한 근대 음악의 가상적인 형식성을 해체하고 음악의 요소들을 다시 재조직함으로써 음악의 총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극도로 악마적이고 폭력적인 시도로도 보일 수 있지만, 또한 비판적인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레버퀸의 마지막 곡인 파우스트 박사의 비탄은 베토벤 9번 교향곡에서 이야기되었던 인류애와 자유를, 실패한 자유주의적 화해를 거부하고 비판한다. 기만과 가상들을 철저히 해체한 이성은 모순된 현실을 마주하고 포착한다. 그러므로 레버퀸의 음악은 야만적이고 퇴행적이며 어쩌면 반인간적인 모습을 띄고 있지만 예술적인 정신은 미학적으로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세계를 모방하고 정복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파우스트 박사가 간척사업을 통해서 자연을 길들이고자 했던 시도와 음악을 통해 붕괴되어 가는 세계에서 구원받고자 했던 레버퀸의 시도는 같은 선상에 있다. 물론 그 결과는 알 수 없다.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 의해서 구원받지만, 레버퀸의 파우스트 박사에게 남은 것은 인간적인 탄식이다. 그러므로 레버퀸의 시도는 휴머니즘이 실패한 목표를 위한 반휴머니즘, 진보를 겨냥한 회귀라고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하지만 물론 그 결과는 알 수 없다. 더 이상 천상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고, 변신론들의 주제가 되는 것처럼 신은 보이지 않는데, 남은 건 비탄과 한숨, 그리고 벌거벗은 인간뿐이다.

이 소설을 단순히 나치즘 비판이라고 읽기에는 토마스 만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미학의 목표가 너무 큰 것 같다.



+생각해보니, 파우스트 박사를 보고 나중에 든 생각이 있어서 여기에 적어야겠다 생각했는데, 까먹고 있었다.

요즘에 하도 갑갑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옛날에 읽은 역사책들이 생각나면서 '유럽'이, '독일'이 모두 좌초한 꿈이라면 '한국'이란 꿈 역시도 예외는 아니리라는 생각. 독일 민족의, 독일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모든 꿈과 노력들, 희망과 절망, 피와 땀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최후를 맞이했다면… 우리는, 우리 한국인의 꿈은 어떻게 될까. 수천년의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자유와 평등을 생각했던 사람들. 독립과 전쟁, 그리고 독재와 민주화같은 굵직굵직한 일들이 차례로 있다가 결국 우리가 도달할 지점이 조로해버린 그저 그런 국가와 사회라면. 이도 역시 밀란 쿤데라가 이야기한 건데 종말은 막 우르릉꽝꽝 굉음을 내면서 오는 건 아니라고 했다. 한국이라는 꿈도 역사 속에서 수없이 명멸해간 국가들처럼 소리없이 사라지고 잊혀져버린다면. 10세기 무렵의 중세인들은 아무도 오래전에 나누었던 자유와 시민, 보편과 이상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니체식으로 표현하면 한국 민족의 기력이 쇠약해지고 그 쇠약의 징후로 데카당스가 유행하는데, 요즘의 정치와 사회는 그런 쇠락의 징후가 두드러지는 것 같다. 도대체 누가 이 시대에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자유와 평등이란 게 한순간의 꿈이었을 뿐이라는 식의 데카당스를 사람들은 더 좋아하리라. 아니면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한국식 민주주의'에 저질스럽게 이어붙이거나.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이 있고 우리가 소명을 받은 민족이라면, 우리가 이루어낸 것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프로파간다들은 우리의 발전에 자부심을 느끼고,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 이들은 모두 국가의 적으로 몰아버린다. 그러나 쇠락의 징후가 명확해질 때 그것을 알리는 이들이 어떻게 국가의 적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자부심을 느낄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까. 부끄러워하고, 그런 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일을 반국가적이라고 몰아갈 때, 국가는 국가의 미래에 반하고 있다. 




아우라

저자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9-11-1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환상적 기법으로 현실의 이면을 드러낸 현대 멕시코의 대표 작가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오랜만이네.

푸엔테스를 다시 읽은 것도 오랜만이고, 이 블로그에 다시 글을 쓰는 것도 오랜만이다.

여기가 오랜만이라는 말, 그리고 앞으로는 충실하겠다는 말,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도 또 하게 되네.

푸엔테스를 처음 읽은 것은 도서관에 있던 낡은 <아르떼미오의 최후>를 만났을 때이다.

아마 이 블로그를 뒤져보면 있을지도 모를 부끄러운 독후감도 기억난다.

기억력은 그때가 훨씬 좋았는지 나는 <아르떼미오..>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 소설을 멋모르고 읽었던 것도 기억한다.

한 7~8년, 길게는 10년 전에는 소설들을 아무것도 모르면서 용맹하게 읽었다.

덕분에 많은 책들을 접할 수 있었지만 그것들을 어떤 연결선상에 위치시켜야 할 지, 어떻게 꿸 지, 어떤 전통으로 이해할지를 전혀 알지 못 했다.

보르헤스도, 마르께스도, 푸엔테스도, 그리고 요즘 나를 꽉 잡고 있는 밀란 쿤데라도 더 나은 이해가 가능한 날들까지 정치학 책들 저편으로 보류된 채로 남겨져 있었다.


우연하게 다시 푸엔테스를 마주친 것은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집에서였다.

그곳에서 푸엔테스는 <아르떼미오..>와 무관하게 쿤데라에게 친화력을 가지는 라틴 아메리카의 소설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동안 책장에 박혀있던 <아우라>를 읽으니, 


"너는 광고를 읽어. 이런 광고는 날마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너는 곰씹어 읽어 보지. 바로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광고야."


라는 문장에서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의 냄새가 느껴졌어. 늙은 아르떼미오가 죽어가며 토악질을 해댈 때의 그 냄새가.

이 도전적인 문장 속에서 주인공은 불연듯 카페에서 일어나 새로운 제안에 대해 솔깃해하며 거리로 나간다.

푸엔테스가 이 소설을 쓰고 찾아냈던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처럼, 영웅들은 갑자기 일어나서 어디론가 걷기 시작하는 거지.

펠리페 몬테로는 그렇게 이타카와 미야기로,페넬로페와 죽은 신부로, 그리고 불안한 욕망 속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떠난다. 


아주 짧은 소설에, 일곱 소절의 후기가 덧붙여져 있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어서 꼭 같이 읽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기묘하지만 강렬하고 아름다운 두 악장의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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