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나라도 이렇게 표지만들면 안 될까.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 대해서 리뷰하도록 하자! 


불멸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중에서도 제법 길고 두꺼운 책이다. <농담>이나 <이별의 왈츠>처럼 경쾌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좀 더 무거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과 망각의 책>과 상당히 비슷한 외양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분량이 길다기보다는 여러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있고, 그 이야기들이 중첩되어서 보여주는 색깔이 복잡미묘하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은 쿤데라의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꽤나 어려운 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불멸>이 뭐에 대한 이야기다, 딱딱 이야기할 수 있는 자신은 없다. 그러므로 천천히 여러 이야기들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선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갈등구조인 아녜스-로라의 대칭쌍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소설에서 두 자매는 끊임없이 쫓고 쫓기는 경주를 펼치고 있다. 아녜스는 우스꽝스러운 불멸에 대해서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의 다른 책제목인 <배신당한 유언들>처럼 어떤 개인의 유산은 그가 지상을 떠나는 순간 더이상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혹은 그녀의 유산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 그것이 산 사람의 죽은 이에 대한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아녜스는 그녀의 몸짓을 로라에게 빼앗겼을 때의 불쾌감은 자아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당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자신과 로라의 운명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현대성의 병폐는 자아에 대한 타자의 무자비한 침범과 또 그것이 정당화된다는 점에 있다. K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조차도 타자들은 성실하게 관찰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가. 그래서 아녜스의 아버지는 죽은 아내의 사진을 불태우고, 집을 떠나서 혼자 살기를 원하고, 임종이 다가와서는 아녜스를 그만 보기를 원했다. 아녜스와 그녀의 아버지는 오롯이 기억되기를 원한다. 그 기억은 그 유산을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자들에게만 허용되어야 했다. 그런 이들에게 원하지 않는 불멸, 불멸이라는 소송은 원치 않는 존재의 징벌이다. 



역사와 현실 속에서 항상 이기는 쪽은 미래다. 불멸이란 법정에서 정의는 항상 미래에 있다. 정의란 미래에 속해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해도 될까. 『소설의 기술』에 나오는 것처럼 미래는 과거에 대해 당당하게 권력을 행사한다. 아녜스는 끊임없이 로라를 따돌리고자 노력했지만 끝내는 자신이 따라잡히리라는 사실을 안다. 괴테 역시도 '이 귀찮은 쇠파리(diese leidige Bremse)' 베티나가 끝내는 자신의 유언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괴테와 베티나는 이 소설의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대립쌍이다. 영민한 베티나는 불멸을 향해 걸어가는 괴테의 모습을 보았고 내 생각으로는 그 불멸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베티나는 괴테에게 어린아이로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무릎에 앉는 베티나에게 괴테는 매혹되었지만 곧 괴테는 베티나의 관심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베티나가 그에게 편지로 전한 말 "나에겐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리라는 굳고 견고한 의지가 있답니다."라는 문구에서 베티나의 관건은 '영원히'와 '의지'였던 것이다. 베티나는 괴테에 대한 책을 쓰기를 원했고, 괴테의 편지를 출간하기를 원했고, 괴테의 연인으로 기억되고 싶어했다. 그녀에게 괴테의 다른 부분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세계의 다른 여러 부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베티나와 로라는 그래서 무언가를 얻어낼 때의 몸짓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금 당신들이 하는 말에 난 흥미 없어요. 난 회계사가 아녜요. 나란, 바로 이런 인간이에요!" 라고 대답하며 그녀는 손가락 끝을 가슴에, 정확히 두 젖가슴 사이에 얹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가볍게 뒤로 젖히고 얼굴을 미소로 가린 채 두 팔을 갑작스럽게, 그러면서도 우아하게 앞으로 던졌다. 동작 초기에는 손마디들이 모두 붙은 상태였으나, 마지막 순간에 두 팔이 떨어지면서 두 손바닥도 활짝 펼쳐졌다. 

 그렇다. 여러분의 기억은 정확하다. 앞 장에서 '뭔가' 하고 싶다고 말할 때 로라가 바로 그런 몸짓을 했다. 그 사황을 돌이켜 보자. …

 베티나와 로라의 그 몸짓을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 명명하자. 큰 불멸을 갈망하는 베티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길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작은 불멸을 희망할 뿐이지만, 로라 역시 같은 것을 원한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자신이 겪는 불행한 순간을 초극하여, 자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베티나와 로라의 불멸 속에서 괴테와 아녜스는 불멸하는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남을 것이다. 베티나는 괴테를 찬미했지만 또한 귀족 앞에서의 모자사건처럼 괴테를 우스꽝스러운 불멸로도 기억하게 만들었다. 불멸의 소송의 당사자가 된 괴테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괴테가 불멸이라는 법정에 대해 두려움에 떠는 헤밍웨이에게 이야기하는 구절은 <I'm not there>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쿤데라가 괴테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것은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미지 안에 보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괴테는 죽고 오직 그의 책들만이, 그의 유산만이 남을 뿐이다. 물론 괴테는 모두가 그 뒤에 남을 이미지에 대해서 신경쓴다는 인간적인 실수는 인정한다. 쿤데라가 그리는 괴테 역시도 그런 실수로부터 벗어날 순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소송이 괴테 그 자신에게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괴테는 노발리스가 이야기하는 완전한 비존재의 '관능'으로 잠들기를, 그래서 바보같은 불멸의 소송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죽음, 불멸없는 죽음은 쿤데라에게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것의 반대는 관념적인 죽음, 시인이 꿈꾸는 위대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뒤로 남긴다는 사실에 아녜스는 질색하고 로라는 매달린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 아녜스는 폴이 그녀에게 다가오기 전에 더 빨리 죽기를 소망한다. 반대로 로라는 연인의 별장에서 죽기로, 자신의 육체를 연인에게 온전히 바치고 가기를 소망한다. 카프카는 자신의 모든 글을 불태우라고 유언하고 미테랑은 홀로(그러나 역사와 함께) 팡테온을 순례한다. 내 생각으로는 밀란 쿤데라가 옹호하는 지점은 철저하게 전자이다. <호모 센티멘탈리스>에서 쿤데라가 비판하는 지점은 기독교 유럽은 '사랑'을 통해 자아의 소유권을 효과적으로 침해하는 방식을 발전시켜왔다는 것이다. 개인의 사랑과 감정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이해되고 준수되어야할 것들을 어기는 유죄를 너무나 쉽게 무죄로 만든다.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숭고한 감정에 고양된 사람들은 원을 그리고 날아오른다. 쿤데라가 고발하는 전체주의의 방식은 이렇게 원을 그리고 날아오르며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가리시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라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베티나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것인 무언가를 뺏고 소유하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이런저런 이름으로 타인을 재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편하게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은 사랑의 이름으로 벌어지곤 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사랑, 민중에 대한 사랑, 질서에 대한 사랑 등등…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쉽게 재단하는 것이 부정의하다는 지점을 지적한다. 왜 프롤레타리아와 애국자들을 사랑하고 예술에 정통한 베티나야말로 괴테의 사랑에 어울리고 실제로는 자신이 프롤레타리아였고 누구보다도 괴테에게 충실했던(특히 육체적으로) 크리스티아네는 역사에서 이름을 남기지 못할까. 그것이야말로 폭력이며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을 (강변하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은 물론 아니다) 『불멸』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읽으니 소설을 팸플릿 읽듯 읽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불멸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1-11-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쿤데라 전집 07 불멸소설 속의 소설이요 가장 슬프고 에로틱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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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에서 스타브로긴의 고백(혹은 치혼의 암자?)이라는 마지막 장이 떠오른다. 사실 이 마지막 장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삭제한 바 있고 나 역시 이 장은 작품의 통일성을 크게 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뭐 반전이 심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샤토프와 트로피모비치의 죽음, 그리고 스타브로긴의 죽음까지 달려온 독자가 생각하고 있었던 주제로부터 다분히 벗어난, 흥미롭지만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벗어났다기 보다는 '고백' 장은 마치 같은 작품 안에서 작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도발같다. 『악령』은 여러가지 주제들이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는데 갑자기 스타브로긴이 이 불협화음은 다 어떤 주제의 부분들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랄까. 만약 우리가 스타브로긴의 의견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해결해야할 문제들은 남아있다.

-그렇다면 스타브로긴의 주제는 무엇인가?

 나는 스타브로긴의 구원에 대한 탐구를 보고 스웨덴보리의 영지주의가 떠올랐다. 스웨덴보리는 보통 윤리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는 종교적인 구원을 진선미가 합치된 차원으로 고양시키고자 했다. 가령 구원의 윤리가 삶의 복잡다양한 쾌락과 만족들을 배제하고 삶을 가난하게 만든다면, 그 가난한 삶을 가진 사람들의 정신은 만족을 모르는 상태로 언제나 갈망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지복의 천국에서 갈망만을 여기는 정신은 무슨 복락을 누릴 수 있을까? 스웨덴보리는 그래서 천국은 그런 모든 가능성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지성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스타브로긴의 탐구는 구원이라는 관념에 대한 도전이다. 그의 탐구는 철저하게 윤리적인 힘의 반작용을 관찰하고 그럼으로써 신이 어떤 권능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데 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재력과 인간적인 능력은 그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어떠한 지점에서도 그의 행위에 대한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세계는 침묵하고 스타브로긴의 간지는 치혼에게 무시당한다. 그의 연구는 그의 노력에 비해 적절한 결과를 도출해내지 못한 것이다. 

-스타브로긴의 주제는 다른 주제들을 포괄하는가?

 키릴로프의 무신론이나 샤토프의 슬라브주의, 아니면 스테판의 자유주의는 스타브로긴의 윤리적인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만약 스타브로긴의 관점으로 악령을 재구성한다면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애초에 기획했던 '정치적 팸플릿'의 형태를 깡그리 무시하게 된다. 물론 『악령』을 정치적 팸플릿이라고 규정하는 건 아니다(그러나 실제로 『악령』에 대해 정치적 팸플릿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도스토예프스키를 현기증만들게 했던 각양각색의 악령들이 매달려있던 정치라는 문제를 완전히 종교로 환원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스타브로긴의 고백을 『악령』의 다른 부분들과 어울리도록 해석하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라면서 무책임하게 글을 끝맺는다....ㅠ 학교에서 책 갖구 왔는지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없네.. 슬프다.)

뭔가 써야할 떄면 늘 그것과는 관련없는 글이 읽고 싶은 법이다. 

학부시절부터 정말 재밌고 흥미로운 글들은 항상 시험기간에 만났던 기억이 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지향점은 개개인들의 내러티브를 이론으로는 보존할 수 없고 내러티브들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 필요하다는 지점인데, 그를 위해서는 내러티브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내러티브와 이론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소설은 이론과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이 작업에 영감을 준 책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이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유럽 소설에 대한 큰 그림은 거진 다 밀란 쿤데라의 것을 본뜬 것이다. <소설의 기술>에서 내가 감명받았던 부분은 소설은 이론과는 다른 인식을 제공하는데, 그건 어떤 다른 전통으로는 보존할 수 없는 성질의 진리라는 주장이다. 이를테면 권태나 지루함, 모멸감, 혹은 철학에서 다루는 시간과 공간의 문제들, 혹은 사회이론에서 다루고 있는 현대성의 문제들에 대해서 소설만이 밝혀줄 수 있는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소설은 단지 철학이나 과학이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는 장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철학이나 과학이 다루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잘, 혹은 더 잘 다룰 수 있다. 로티가 밀란 쿤데라를 지지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인데, "Heidegger, Kundera, and Dickens"라는 논문에서 그는 하이데거가 그토록 극복하고자 했던 형이상학과 유럽(대문자 Europe)의 모순점을 내러티브(쿤데라는 이런 표현을 싫어할지도 모르겠다)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쿤데라와 로티의 주장에 따른다면, 유럽에는 철학과 과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훌륭한 전통이 남아있는 것이다. 



소설과 소설가

저자
오르한 파묵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09-14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파묵 씨, 당신은 이런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스탕달에서 도스...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오르한 파묵의 대학강연집인 <소설과 소설가>는 원제가 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인데 굉장한 의역이면서도, 또 달리 생각해봐도 핵심주제는 소설과 소설가의 관계라 참 번역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소설의 기술>처럼 테크닉을 알려주는 책으로 오해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건 알려드리고 싶다. 생각해보면 <내 이름은 빨강>같은 소설이나 <검은 책>등을 봐도 오르한 파묵이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은 자신이 그린 그림과 자신의 관계였다. 파묵은 실러를 인용하면서 소박성과 성찰성을 양측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독서에 있어서, 그리고 소설에 있어서 소박성과 성찰성은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 힘든 관계임은 분명하다. 소설을 읽는다는 지점은 작가의 이야기 안에 발을 담근다는 점을 의미하고, 이 세계는 비록 상징적이지만 분명히 어떤 실재에 맞닿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분명 문장들 사이에 위치하고 우리가 어느 정도 이 세계로부터 이격하지 않으면 그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하다. 따라서 이 둘의 접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데, 파묵은 구체적이지만 다소 지리하게 경험을 통해 논증하고 있어 나는 이 부분을 구성주의적인 독자의 입장에서 '구성적 실재'를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파묵씨의 실용적인 답변이 나는 마음에 들고 지지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 싶다.



 나는 여기서 소설 쓰기와 읽기가 주는 즐거움이 두 부류의 독자들에 의해 완전히 망쳐진다는 것을 덧붙입니다.

1. 전적으로 '소박한' 독자들: 이 사람들 손에 들린 책이 소설이라고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은 텍스트를 작가의 자서전 또는 경험담을 약간 고친 연대기라고 생각합니다.

2. 전적으로 '성찰적' 독자들: 이 사람들 손에 들린 책이 작가의 가장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바탕으로 했다고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을 모든 텍스트가 철저한 계산 아래 만들어진 허구라고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런 사람들을 절대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소설 읽는 즐거움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 구성적 실재가 어떻게 다시 현실과 연관을 맺게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쓸모있는 예시인 것 같다. 파묵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관계를 파고들고자 한다. 하나는 언어가 어떻게 영혼에 감각적인 인상을 가져오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이 어떻게 소설적인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느냐이다.

 첫번째 측면은 주로 소설의 창작에 관련되어 있다. 파묵에 따르면 소설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인상의 표현이다(거칠게 말하면). 그에 따르면 소설가에게는 화가와 비슷한 충동이 내재되어 있어서 그가 '본' 것을 그려내고 싶은데, 화가가 그것을 선과 색채로 한다면 소설가는 단어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경우 소설가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을 조금 더 보완하고 싶은데, 인상을 궁극적으로 시각이라고 제한하는 건 파묵이 인식철학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괴테를 회화적인 재능보다 단어에 대한 재능이 앞선다고 이야기하는 지점을 생각해보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사전적으로 제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차라리 이 지점에서는 쿤데라 식으로 작가는 형식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두번째 측면으로 파묵이 보여주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소설을 향유하고 즐기고, 무엇보다도 참여하느냐라는 문제이다. 파묵이 좋아하는 말처럼 소설은 소설가가 가지는 하나의 박물관일 수 있다. 박물관에 무엇을 모아두든 그것은 소설가의 전적인 자유에 속할 것이지만, 또 소설가는 아무래도 낮에 입장한 독자들의 입담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시점에서 박물관은 오롯이 소설가의 것만은 아니게 된다. 재밌게도 파묵은 이 지점에서 부르디외를 인용하고 있는데(아마 부르디외의 성찰성 논의를 읽었다면 더 흥미로웠을게다) 분명 어느 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성취이며 여기에는 보상이 있다. "어떤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은 작가의 의도나 독자들의 반응을 파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텍스트 속 지식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고 텍스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내는 데 있습니다." 라는 식의 기준을 충족한 독자들은 적어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너, 오르한 파묵 읽어봤어?" 이 부분에서 파묵은 쿤데라보다는 훨씬 독자친화적인데, 쿤데라라면 작가의 박물관에 대해 세르반테스를 빌어서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토마시는 나의 것"이라고. 


뭐 재미있는 책이었다. 라고 마무리하기엔 조금 짧게 쓰는 거 같은데, 사실 파묵의 강연 자체가 뭔가 결론을 주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이론적인 문제점을 강하게 빵 찔러놓고 경험적인 영역에서 이런 측면도 있고 저런 측면도 있는 거 같다.. 좀 이런 식인 거 같아서. 물론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라는 독자에게는 각별하게 느껴진다. 이런 부분은 정말 좋았다. 아니 아, 쓰고 나니까 이 부분을 넘어가면 안 될 거 같다. 


 하지만 내가 이제 자세히 설명할 박물관 같은 특성이 있는 소설들은 생각을 일깨우기보다는 간직하고 보존하며 잊히는 것에 저항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이게 내러티븐데!!!). 마치 서양에서 가족들이 일요일에 박물관에 가서 자신의 과거 가운데 일부가 잘 보존된 것을 보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처럼, 소설 독자들도 책장을 넘기다 실제 버스를 탔던 정거장, 읽었던 신문, 좋아하는 영화, 창밖으로 보았던 저녁노을, 마셨던 사이다, 보았던 포스터와 광고, 걸었던 골목과 거리와 광장─<검은 책>을 발표한 후 독자들이 소설에 나온 거리를 걷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들어갔던 상점(알라딘의 가게 같은), 입었던 옷과 마주할 때 커다란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 행복감의 한 원인은, 우리가 박물관에서 느끼는 어떤 착각과 비슷합니다. 이는 역사가 공허하고 무의미하지만은 않으며,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는 간직될 거라는 느낌과 자긍심입니다. 진정한 문학과 소설의 불멸성에 관해 널리 퍼진 공허한 믿음들도 이 자긍심과 위로를 뒷받침해 줍니다. …
 많은 소설가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바로 내가 본 것들을 보고, 느낀 것들을 느꼈군요. 마치 내 인생을 쓴 것 같아요." 이 호의적인 말에 기뻐해야 할지 속상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무에서 상상력만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창조적인 소설가가 아
니라, 어떤 공동체에서 모두 함께 공유하는 어떤 삶을 기록하는 역사가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하이데거와 쿤데라, 그리고 디킨즈에 대한 로티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상상으로 시작된다. 만약 서양이 버섯구름과 함께 멸망하고 100년이 지난 뒤에 인도와 한국의 독자들은 Europe을 어떻게 기억할까? 로티는 철학적인 결론으로 소설을 이야기하는데, 어떤가. 이게 좀 설득력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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