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해방을 향한 추동력을 가지고 지금 진행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지위와 계급을 넘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개인들과 집단들을 자기 자신의 개성적인 사회적 및 정치적 사태에 댛 자기의식적인 주체로서 단결시키는 개인주의화(다른 저서에서는 자기화로도 나와있는?) 과정의 주장과 약속을 출발점으로 택할 수 있을까? 아니면 바로 그 과정의 결과로 사회적 및 정치적 행동의 최후의 보루가 없어지게 될까? 그렇다면 개인주의화된 사회는 갈등과 드러나지 않는 병세로 분열되어 실제로 아무것도 마지 않는, 심지어 새롭고 음험한 근대화된 야만주의조차도 막지 않는 정치적 무관심과 같은 것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제도적 종속성을 통해 개인주의화된 사회는 동시에 전통적인 (계급) 경계들으 가로질러 모든 종류의 갈등과 속박과 연합에 취약하게 된다. 노동시장 양편의 적대감은 한정된 대비로 그 중요성이 줄어들며, 사적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억압된 사회성들이 그 중심에 자리 잡는다. 뒷뜰 가까이에 건설되는 고속도로, 학교부지 선정의 악화, 부근에 건설되고 있어서 '집합적 운명'을 뚜렷이 의식하게 하는 핵폐기물 처분장과 같은 것들이 그 예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제도적으로 형성된 집합적 운명이 개인주의화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맥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어떻게 인식되고 취급되는가이다. 이것을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계급의식의 오목거울이 부숴지지만 산산조각나지는 않고, 작은 틈과 균열이 무수히 많이 있는 거울의 표면이 통일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없을지라도 각 조각은 자체적인 총체적 상을 만들어 낸다고 말할 수 있다. 반복해서 몰아쳐 오는 개인주의화의 격랑을 통해 사람들이 사회적 속박에서 풀려나고 사유화되면서 이중의 효과가 나타난다. 한편에서 인식형태들이 사적(私的)으로 되는 동시에 시간축을 따라 인식할 수 있는 것이지만 비역사적으로 된다. 아이들은 조부모는 물론이고 더 이상 부모의 생활맥락조차 모른다. 말하자면 결국에 역사가 (영원한) 현재로 오그라들 때까지 인식의 시간적 지평이 점점 더 협소해지고, 모든 것이 자신의 개인적 자아와 삶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된다. 다른 한편 공동으로 조직된 행동이 개인적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들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자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제약요인들이, 정확히 말해서 또다시 새로운 제도적 조건의 생산물인 영역들이 늘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주의화는 각자의 생애가 기존의 결정요인들에서 벗어나서 그 또는 그녀 자신의 손으로 결정됨을 의미한다. 근본적으로 각자가 결정할 수 없는 생활기회의 비중은 줄어들고 있으며, 각자가 결정할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결정해야만 하는 생애의 비중은 늘어나고 있다. 생활상황과 과정의 개인주의화는 이리하여 생애가 자기성찰적으로 됨을 의미한다. 즉 사회적으로 규정된 생애가 자가생산되고 계속해서 생산되는 생애로 변형된다.…"


울리히 벡<위험사회> 中 



순수 박물관 1

저자
오르한 파묵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0-05-3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거울 앞에 있는 작은 선반에서 퓌순의 립스틱을 보았다. 그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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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박물관』을 읽었다. 사실 소설을 읽는 내 마음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이 소설의 아웃라인을 미리 살펴보지 않고 읽기 시작한다면 한 여자에 대한 다소 이상한 집착을 가진 케말이라는 부르주아 청년의 넋두리를 봐주기도 힘들고, 또 이게 어디로 흘러가나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무엇보다도 문제는 난 주인공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실 '주인공처럼' 사랑하고 집착할 수 있다면 그건 다소 이상하지 않을까? 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21세기를 사는 가난뱅이 대학원생이 1970-80년대 터키의 사랑이야기를 사랑이야기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은 인정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보다가 책을 덮었다가 보다가 세부적인 심리묘사에선 버티지 못하고 후딱후딱 넘긴 적도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세부들로 인해서 파묵이 소설을 통해 의도했던 아이디어가 실패했다고 보기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디어는 무엇일까? 책의 말미를 보면,


 마치카에 있는 제이다의 집에서 나와, 밤의 정적 속에서 케말 씨와 함께 니샨타쉬를 향해 걸었습니다.
 "당신을 파묵 아파트까지 바래다 드리지요. 나는 오늘 밤 박물관이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테쉬비키예의 집에서 머물 겁니다."
 케말 씨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파묵 아파트에서 다섯 건물 떨어진 곳에 있는 멜하메트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 그는 멈춰 서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오르한 씨, 당신의 소설 『눈』을 다 읽었습니다. 나는 정치는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미안합니다만, 읽는 데 좀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말 부분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도 그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소설 끝에서 독자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내게 그런 권리가 있을까요? 언제 책을 마무리할 겁니까?"
 "당신이 박물관을 완성한 후에요." 
 이제 우리 사이에 농담처럼 된 말이었습니다.
 "나는 그 인물처럼, 멀리 있는 독자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반대로, 우리 박물관을 둘러본 사람들은, 그리고 당신 책을 읽은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할겁니다. 하지만 다른 할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주머니에서 퓌순의 사진을 꺼내 멜하메트 아파트 앞에 있는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퓌순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도 그의 곁으로 갔습니다.
 "아름답지 않나요?"
 삼십 년쯤 전에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남자는, 9번이라고 새겨진 검은 수영복을 입고 있는 퓌순의 사진을, 벌꿀 색 팔을, 전혀 즐겁지 않고 오히려 슬픈 얼굴을, 멋진 몸을, 사진을 찍은 후 정확히 삼십사 년이 흐른 후에도 우리를 매료하는 인간적인 고뇌가 묻어 있는 표정을, 그녀의 영혼을, 감탄하며 사랑을 다해 존경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케말 씨, 이 사진을 박물관에 전시하세요."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에 나오는 나의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오르한 씨, 잊지 말아 주세요."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퓌순의 사진에 사랑을 다해 입을 맞추고는, 재킷의 가슴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승리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이 구절이 나는 가장 명료하면서도 핵심적인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케말과 퓌순의 사랑이야기에 대해선 내가 다소 냉랭하다는 점은 안타깝지만.. 케말의 이상한 사랑은 내가 이상하다고 이야기해도, 혹은 다른 누가 뭐라고 이야기한다고 해도 케말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었으리라. 그래서 '이상함'과 비례해서 사랑에 대한 기억(혹은 묘사)은 극도로 디테일해질 수 밖에 없다. 읽는 내가 견딜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부르디외와 인류학에 대한 파묵의 관심이 디테일에 대한 추구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망각되어가고 이해받지 못한 것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그것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고,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궁극적으로는 그것들을 생생하게 전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순수박물관'은 작중 화자인 '케말'이 상징하는 잊혀져가고 이해받지 못 하는, 지금은 낡아버린 어떤 맥락으로 하여금 다시 목소리를 내고 의미를 복권하는 공간이다. 생각해보라, 국가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 대립하는 터키에서, 서구화와 신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개인 모두들은 자기만의 박물관을 가지고 있다. 박물관에 놓인 사물들은 외면과 내면이 교차하는 지점이면서, 또한 우리 각자의 주관들이 이야기를 통해 상호소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사물은 회상이라는 형태로, 또는 기대와 예측이라는 형태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의미가 동화된다거나 무반성적인 공감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케말의 박물관을 보고, 그리고 나의 박물관을 보고 우리는 말하고 떠들 수 있다. 케말이 누누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박물관에는 존중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순 없다.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으려면 박물관 역시 필요하지 않으리라. 박물관은 반드시 기꺼이 보고자 하는 관람객과 관람객의 생각, 그리고 그들의 코멘트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런 아이디어에는 공감을 해도, 사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케말이라는 전시품이다. 이 지점에서 오르한 파묵은 전혀 케말에 대해서 양보해야할 의무도 그리고 의향도 없겠지만, 여튼 나에겐 그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사회적인 목소리가 결여되어있다거나 찌질하다거나 그런 문제보다는, 케말의 모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나열한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꼭 이해해야할 필요는 없기 때문인 것 같다. 파묵은 자연주의자인가? 혹은 케말의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위치와는 상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인가. 이 부분은 조금 헷갈린다. 그래서 나는 파묵의 다른 소설들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이 소설을 좋아할 순 없을 것 같다. 



쿤데라:

아녜스는 누구인가?

이브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처럼, 비너스가 물거품에서 탄생한 것처럼, 아녜스는 내가 수영장에서 보았던 그 육십 대 부인의 몸짓에서 튀어나왔다. 손을 들어 수영 선생에게 작별인사를 하던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내 기억에서 흐릿해진다. 그때 그녀의 몸짓은 나에게 어떤 엄청난, 불가사의한 향수를 일깨워 주었으며, 바로 그 향수가 내가 아녜스라고 이름붙인 인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소설의 인물은 특히나 더, 흉내 낼 수 없는 어떤 유일한 존재로 정의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A라는 인물에게서 관찰된 그 몸짓, 그녀를 특정 지우고, 그녀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 내며, 그녀와 더불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던 그 몸짓이 동시에 B라는 인물의 본질이 되고, 그녀에 관한 내 모든 몽상의 본질이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 점은 성찰을 요한다.

만약 우리 지구의 인구가 800억을 넘어섰다면, 그들 각자가 자기만의 몸짓 일람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있음직하지 않은 일이다. 산술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의 사람 수에 비해 몸짓 수가 비교도 안 될 만치 적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충격적인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즉 몸짓이 개인보다 더 개인적인 것이다. 이를 격언 형태로 얘기하면, 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가 된다.

첫 장에서 나는 수영복 차림의 부인에 대해 그 몸짓 덕택에,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그녀 매력의 정수가, 그 촌각의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틀린 생각이었다. 결코 그 몸짓이 부인의 정수를 펼쳐 보인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부인이 한 몸짓의 매력을 드러내 보인 거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몸짓은 한 개인의 소유로 간주될 수도 없고, 그의 창조물로 간주될 수도 없으며그의 도구로 간주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이다. 말하자면 바로 몸짓들이 우리를 사용하며, 우리는 그들의 도구요, 꼭두각시 인형이요, 그들의 화신인 것이다.

 

 

보르헤스:

모든 철학서 가운데서 가장 비통한 책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은 플라톤의 파이돈이다. 이 대화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오후를 다루고 있다.소크라테스는 사형이 집행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감방으로 맞아들인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를 맞아들인다. 막스 브로드Max Brod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이 일생에 썼던 가장 감동적인 구절을 본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파이돈]는 플라톤이 아팠다고 생각합니다." 방대한 대화편을 쓴 플라톤은 여기서 단 한 번 자기 이름을 불렀다고 브로드는 말했다.

나는 플라톤이 "저는 플라톤이 아팠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형언할 수 없는 문학적 아름다움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어 감탄할만한 대목이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침대에 앉아 있고, 사람들이 족쇄를 풀어주었다. 그는 무릎을 문지르고, 이제는 쇠사슬의 무게를 느끼지 않아 기쁘다고 하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참 이상한 것이야. 쇠사슬이 무거워 발이 아팠는데, 이제 쇠사슬을 풀어버리니 가벼워진 느낌이군. 기쁨과 고통은 함께하는 것이야. 그 둘은 쌍둥이 같은 것이지."

그 순간에,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고통은 분리불가능하다고 성찰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탄스러운가. 이것은 플라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우리에게 용기 있는 한 인간을, 곧 죽게 되지만 임박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얘기를 하지 않는 인간을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날 오후 소크라테스는 친구들과 토론을 했을 뿐, 가슴 아픈 작별을 원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부인과 자식들을 내보냈고, 울고 있는 한 친구를 내보내고 싶어했다. 그는 침착하게 토론을 하기를 바랐다. 그저 대화를 하고 사색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죽으리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의 임무는, 그의 습관은 토론하는 것, 여러 가지 방식으로 토론하는 것이었다. 왜 그는 독당근즙을 마시려고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은 재미 있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 오르페우스는 나이팅게일로 변해야만 했고, 사람들의 목자 아가멤논은 독수리로 변해야만 했으며,소크라테스는 이야기를 계속하지만 죽음이 이를 중단시킨다. 이미 그는 독당근즙을 마셨던 것이다. 그는 아스클레피오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치기로 맹세한 사실을 생각해내곤, 친구에게 이를 부탁한다. 의약의 신, 아스클레피오가 본질적인 악으로부터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가야 한다. “나는 아스클레오 신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네. 내 생명을 구해주었거든. 이제 나는 죽을 것 같네.” 바꿔 말해서, 그는 자신이 앞서 얘기했던 것을 믿지 않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죽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고전으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가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개인적인 불멸을 부정한다.

 

 

쿤데라:

불멸. 괴테는 이 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Dichtung und Wahrheit’, ‘시와 진실이라는 유명한 부제가 달린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는 열아홉 살 청춘기에 라이프치히의 새로운 극장에서 열심히 지켜보곤 하던 막()이야기를 한다. 막의 배경에는 “der Tempel des Ruhmes”(괴테의 말이다.) 영광의 사원이 그려져 있었고, 사원 앞에는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극작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 한가운데에, 그들 쪽으로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옷차림이 가벼운 한 인물이 사원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등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에게선 어떤 비범한 구석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선구자 없이, 다른 위대한 모델들에게는 무관심한 채,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불멸을 만나러 걸어간 그는 바로 셰익스피어였다.”

물론, 여기서 괴테가 말하는 불멸은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른 불멸,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자들의 세속적인 불멸이다.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다. 작은 불멸, 말하자면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모라비아 마을의 그 시장이 꿈꾸던 불멸)큰 불멸, 즉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은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 어느날 갑자기 한 사람을, 도무지 사실 같지 않고 있음직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이론의 여지없이 가능한 그런 엄청난 불멸에 맞닥뜨리게 하는 생애들이 있다. 바로 예술가와 정치가의 생애가 그렇다.

사람은 불멸을 갈망하지만, 어느 날 카메라는 쓰라린 경련으로 일그러진 그의 입을 우리에게 보여 주며, 그것만이 우리에게 남아 그의 전 생애를 요약하는 하나의 우화로 탈바꿈하고, 그리하여 그는 소위 우스꽝스러운 불멸 속으로 들어간다. 티코 브라헤는 위대한 천문학자였지만, 오늘날에는 프라하 황궁에서 일어난 그 유명한 식사 사건 외에 우리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식사 도중 화장실에 가고 싶은 욕구를 점잖게 참다가 기어이 방광이 터지고 말았는데, 이로써 그 수줍음과 오줌의 순교자는 곧장 우스꽝스러운 불멸자들의 일원이 되고 말았. 나중에 영원히 얼간이 뚱뚱보로 변해 버린 크리스티아네 괴테가 그렇듯 말이다. 소설가들의 세계에서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로베르트 무질이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아령을 들다가 죽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다 아령을 들 때면 혹시 나도 죽는 게 아닐까 하고 겁을 내며 맥박에 주의를 기울인다. 만약에 내가, 나의 소중한 작가처럼 손에 아령을 든 채로 죽는다면, 그로써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열렬한, 열렬하다 못해 광신적이기까지 한 한 사람의 아류가 될 것이고, 곧바로 나에게도 그런 우스꽝스러운 불멸이 보장될 테니 말이다.

 

로돌프 황제 시대에도 카메라(바로 카터 대통령을 불멸로 만든 것)가 있어, 티코가 의자 위에서 괴로워하고, 하얗게 질리고, 양 무릎을 비비 꼬다가, 허옇게 눈을 까뒤집고 말았던 그 궁정에서의 식사 장면을 필름에 담았다고 상상해 보자. 만약 그가 자신의 그런 모습을 무수한 방청객들이 관찰하리란 걸 알 수 있었다면, 그의 고통은 아마 열 배는 더 증폭되었을 것이며, 웃음 또한 그의 불멸의 회랑들에서 훨씬 크게 울려 퍼졌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뭔가 재미있는 화젯거리를 찾는 국민들은 틀림없이, 소변보는 걸 부끄러워했던 이 유명한 천문학자의 영상 자료를 성() 실베스트르 축일 때마다 상영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보르헤스:

살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으며, 물질을 통하여, 물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열어가는 무엇이 있는데, 이 무엇이 바로 쇼펜하우어가 의지(wille)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는 세계를 부활의 의지로 보았다.

끝으로 쇼우는 생명력(life force)에 대해 이야기했고, 베르그송은 엘란 비탈(élan vital)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들에게 하등의 중요성도 없다. 내가 우리들을 느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보르헤스임을 느낀다는 것과 여러분이 A이고 B이고 C라고 느낀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전혀 아무런 차이도 업다. 이러한 자아는 우리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 속에 이러저러한 형태로 현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멸이 필요하다고는 말할 수 있으나, 이러한 불멸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불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적을 사랑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불멸은 드러난다. 그런 순간에 그는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단테나 셰익스피어의 시구를 반복할 때마다 우리는 어느 의미에서 그 시구를 창작했던 순간의 단테나 셰익스피어이다. 결국, 불멸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으며 우리가 남겨놓은 행위 속에 있다. 이러한 행위가 잊혀진들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우리들 각자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이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들 각자는 이 세상이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 만약 이 세상이 개선된다면 희망은 영속할 것이다. 조국이 구원받는다면조국이 구원받아서 안 될 일이 있는가?우리는 그 구원 속에서 불멸할 것이다. 우리들의 이름이 알려지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는 아주 사소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불멸이다.

 

 

쿤데라:

모든 독일 어린이들이 외워야 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독일 시 한 편이 여기 있다.

 

산봉우리마다엔

침묵이,

나무들 꼭대기에서도

너는 느끼지 못한다

여린 숨결 하나,

어린 새들은 숲 속에서 침묵하고 있다.

참으렴,

너도 휴식을 얻을 테니.

 

이 시의 시상은 너무나 단순하다. 숲이 잠들고, 너도 곧 휴식을 취하게 되리라는 것. 시의 소명은 어떤 놀라운 관념으로 우리를 현혹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을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는 데 있다.

번역에서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오직 독어 원어로 읽을 때만 이 시의 아름다움을 알게 될 것이다.

 

Über allen Gipfeln

Ist Ruh,

In allen Wipfeln

Spürest du

Kaum einen Hauch;

Die Vögelein schweigen im Walde.

Warte nur, balde

Ruhest du auch.

 

이 시의 시구들은 음절수가 모두 다르고, 장단격, 단장격, 장단단격이 교차하며, 여섯 번째 시구는 다른 구절들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길다. 그리고 4행 절 두 개로 이루어진 시인데도, 문법적 첫 문장이 비대칭적이게도 다섯 번째 시구에서 끝나면서,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너무나 멋진 이 한 편의 독특한 시 외에 다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음률을 만들어 낸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헝가리에서 이 시를 배웠다. 아버지가 독일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로, 아녜스 역시 같은 나이 때 아버지에게서 처음으로 이 시를 들었다. 그들은 산책 도중 함께 이 시를 암송했으며, 강세 음절을 만날 때마다 터무니없이 강조하면서 시의 리듬을 맞춰 걸었다. 운율이 복잡해서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그들이 온전히 성공적으로 박자를 맞춘 것은 최종 두 시구에서뿐이었다. 바르-테 누어--/-에스트 두-아우흐. 맨 마지막 단어는 너무나 크게 외쳐져, 반경 1킬로미터 내에서는 누구나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이 시를 암송해 준 것은 임종 이삼일 전이었다. 처음에 아녜스는 아버지가 자신의 유년기로, 자신의 모국어로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가 아버지가 자신의 두 눈을 친근하게, 뭔가 말을 하듯, 뚫어지게 쳐다본 점을 생각해서, 지난날의 그 행복한 산책들르 그녀에게 상기시켜 주고자 한 것으로 고쳐 생각했다. 그러다 나중에야 그녀는 이 시가 죽음에 대해 말한 것임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곧 죽으리란 것과, 그것을 알고 있음을 그녀에게 말해 주고 싶었던 거였다. 그녀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배우는 이 천진한 시구들에 그런 의미가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마에 땀이 가득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그의 눈물을 훔치면서 그와 함께 나지막이 암송했다. 바르테 누르, 발데 루헤스트 두아우흐너도 곧 휴식을 얻을 테니.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죽음의 소리를 알아듣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나무들 꼭대기에서 잠든 새들의 침묵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침묵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넓게 퍼지면서 아녜스의 영혼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다시 한 번 말하자. 그것은 나무들 꼭대기 위에서 잠든 새들의 침묵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마치 깊은 숲 속에서 울리는 뿔피리 소리처럼, 아버지의 마지막 메시지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또렷이 울려 퍼졌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긴 선물로써 하려했던 얘기는 무엇일까? 자유롭게 살라는 것, 그녀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는 거였다. 아버지는 감히 한 번은 그렇게 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딸에게, 딸만은 과감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들을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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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은 불멸에 관한 보르헤스의 강연이고 뒤의 글은 불멸이라는 이름의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다. 보르헤스는 불멸에 대해선 정몽주보다는 이방원에 가깝다. 그것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우리의 존재양식 그 자체이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에게 그것은 참을 수 없는것이다. (“우리 뒤에 뭔가를 남겨둔다고?” 놀란 듯한 회의적인 어조로 아녜스가 되물었다.) 오직 완전한 소멸만이 밀란 쿤데라의 주인공들에게 휴식을 가져다줄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니체를 인용한 그의 사유를 생각해보자. 반복은 존재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주면서 동시에 유한성으로 인해 형성된 고유의 의미를 파괴한다. 어떤 사건이 다시 반복가능하다는 점은 어떤 점에서는 매혹으로, 어떤 점에서는 끔찍한 형벌로 다가온다. 아녜스와 아버지가 암송한 시에서 울려퍼지는 존재의 한 순간은 모든 존재의 목소리들로부터 벗어난 침묵이고, 그 침묵은 자유요 해방이다. 쿤데라의 인물들에게 보르헤스의 목소리는 그들이 영원회귀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다시는 괴테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운명을 부르짖는 예언자처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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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로 괴테의 저 시는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가곡집에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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