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이면 이별에 익숙해질까. 겨울이 지나가며 생각해보니 또 많은 것들이 나의 곁을 떠나갔다.

결혼한 친구들, 아바도처럼 하늘나라에 가계신 분들, 이전 교회모임,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기타 등등..

점점 만나는 이보단 떠나는 이들이 더 많아진다는 게 나를 슬프게 한다.

맨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친구에게는 다 만나고 헤어지는거지 뭐, 이렇게 해탈한 듯 이야기하지만 마음의 쓰라림은 가라앉지 않는다.

언제쯤이면 아프지 않게 사람들을 떠나보낼 수 있을까. 



매일같이 커피를 마시고 친구들을 만나고 책을 읽던 장소가 이제 문을 닫는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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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루종일 내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다니다가 나는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게 아니라 사진에 대해서 생각하러 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찍을 수 있는 소재는 한정되어있고, 더군다나 나는 어떤 소재가 작품 자체를 규정하는 방식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좋은 사진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혹은 이 질문에 대해서 일단 가정을 내리고 사진을 찍는 게 유익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을 찾고 싶고, 찾아야만 한다. 이게 내 병증이다.

매사 이런 성향으로 접근하는 게 나의 병증이다.

가령 인생을 살기 위해 좋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이론을 세워야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지적으로 만족스러운 이론과 답을 얻고 싶다.

만족스럽다는 말에 내재되어 있듯이 만족스러운 답은 지적으로 잘 짜여진 이론이자, 쓸모있는 해결책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하고 있듯이 잘 살기 위해 이런 답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며, 혹은 잘 살기 전에 이 답을 안다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나는 경험으로 완성시켜야할 지식에 대해 선험적인 틀을 먼저 요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튼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서,

그나마 사진은 삶이나 세계에 비해서 요구하는 진리의 수준은 훨씬 소박하기 때문에 위안이 된다.

아마도 사진에 대한 철학, 사진에 대한 사회학은 전체 이론의 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통로를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시도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확실한 시각적인 정보를 통해 진리에 접근한다는 주장은 우리를 다시 진리에 대한 명석판명한 관념을 얻고자 했던 데카르트의 시도로 회귀하게 만든다.

그것은 낡고 가망없는 길이다.

나는 다만 사진에 대해서 기록적인 가치만 인정하고자 한다. 그 기록은 전체 역사의 사소한 부분이겠지만 인류학적인 가치를 가져야한다.

사진의 인류학적인 가치에 대해서 나는 "망각에 대한 투쟁"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용어를 빌리고 싶다.

이 말은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인식적 가치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한 말이지만, '기록'과 역사적 인식에 기여하는 측면에서 사진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진은 영원히 즉물성에 묶여있는 매체이지만, 오히려 그 즉물성은 사진이 탈역사적이고 선험적인 형이상학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준다.

소박하게 내가 찍는 사진들은 그런 작은 기록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곧 사라져버릴 기억들에 대해서 나는 기록하고 있으며, 그 대상들이 사라져버려야하는 이유에 나는 암묵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그냥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항상 과모임이나, 사람들이랑 이야기할 때나 사람들은 내가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에 의아해하곤 했다.

모태신앙도 아니고, 딱 봐도 맨날 술마시고 사회비판하면서, 더더욱 사회학을 하는 사람이 일편단심으로 믿음을 가진다면 거짓말같겠지.

나의 믿음은 항상 온갖 종류의 회의와 비판들에 풍전등화였지만, 풍전등화였기에 나는 내 믿음을 더욱 굳게 다지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새벽기도도 가보고, 밤새서 기도도 해보고, 인도도 가보고, 책도 읽어보고, 정말 교회에 목매다는 사람만큼은 아니었지만,

항상 믿음을 의심하는 사람 입장에선 꽤나 순응하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14살 즈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도 나는 '믿음'이라는 이 글자를 아직도 하나도 모르겠다.

무엇이 우리를 창조하고,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는 그것을 믿고.... 단지 이 문장들뿐이지 이 문장의 설득력은 아직도 소음들로만 남아있다.

"왜?"

그동안 교회를 다니고, 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동안 무수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어느 것도 시원시원하지 않았다.

보통 이야기되었던 의무의 근거는 '그래야만 한다'라는 당위와 '다니면 좋다'는 유익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는데,

그야말로 왔다갔다 할 뿐이고, 나는 그 어느 주장에도 설득될 수 없었다.

교회를 다녀야만 한다. 교회를 다녀야 좋다. 그래 좋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아는가?

신이 있다면 어떻게? 왜?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내 흔들리는 믿음의 마지막 원천이었다.

아니 애초에 나는 교회를 다니는 불신자였고 믿음을 갈망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 믿음을 얻는 일은 얼마나 힘든가.

그리고 이 힘듬을 어떻게 신자들에게 나눌 수 있는가. 

매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내 고통은, 그리고 모두의 고통은 교회 안에서 하향평준화가 되어버리곤 만다.

"내 경우에는 이랬지만, " "그런 경우에는 말이지"

모든 차이는 소멸되어 버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질문과 답은 돌고 돈다. 이 순환을 어떻게 돌파해야할지...


그러나 다른 종파나, 다른 종교를 믿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마지막 교회생활 이후엔 희망없는 믿음을 짊어진 나귀가 되거나, 열렬한 무신론자가 되겠지.

길어야 2-3년, 나는 이제 믿음이라는 문제가 점점 허위문제로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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