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 갯골생태공원.

집에서 썩고 있는 망원렌즈 바람 좀 쐬어주고 싶기도 했고, 또 좀 걷고 싶어서 갔는데, 생각보다 괜찮다.

중간에 전망대에는 바다로부터 들판을 달리는 바람이 분다. 

아마 오래전에는 갯벌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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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 시스템은 펜탁스다. 어렸을 때 배운 카메라가 펜탁스라, 그 카메라랑 렌즈들을 공유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었지만, 펜탁스는 나름의 장점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M42 렌즈들과 펜탁스 렌즈들이 플랜지백이 같기 때문에, DSLR 시대에도 펜탁스 기기들은 M42 렌즈들을 비교적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다.  오래전에 나온 수동렌즈들도 펜탁스가 K마운트를 유지하고 있는 고로, 빈티지한 렌즈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펜탁스의 장점이라고 하겠다. 


 장정은 장점이지만, 사실 나는 니콘이, 쏘니가 쓰고 싶다. 크흐. 내가 다시 M42 렌즈에 눈을 돌리게 된 건, 카메라 바디를 바꾸면서 고화소에 맞는 렌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펜탁스 렌즈 중에서도 해상력이 좋은 렌즈들은 수동렌즈라 할지라도 가격이 상당하고, 그렇다면 나온지 오래 되어서 저렴저렴하면서 높은 해상력을 가지고 있는 칼 자이스 렌즈들에 나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M42 렌즈들을 찾으려고 장터에서 기웃기웃거렸는데 웃기게도 쏘니와 다른 마포진영들에서 내놓은 미러리스 카메라들이 M42 마운트를 호환하는데 성공하면서, 내가 오래전에 M42 렌즈에 관심을 가졌을 때보다 가격들이 올라있더라. 조나나 플라나같은 좋은 렌즈들은 아직도 왠만한 펜탁스 최신렌즈 가격을 하고… (애플이 가격방어가 굉장한데, 라이카와 칼 자이스의 가격방어를 보면 말이 안 나온다.) 그래서 결국 칼 자이스 예나 DDR(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바로 동독되시겠다)이 찍힌 이 두 형제를 수중에 넣게 되었다. 


 50mm 렌즈를 두 개? 바본가요? 가 아니라, 둘을 구한 시점이 다르다. 테사 렌즈는 한 8년 전에 구매하고 잘 쓰지 못 해서 장농에서 고이 쉬고 있었고, 이번에 구한 게 판콜라 렌즈다. 후에 사용기와 사진 샘플들을 첨부하겠지만, 써보니 역시나 칼 자이스는 단단하고 선예도가 좋다. 물론 핀맞추는게 지옥이지만… 그나마 라이브뷰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작년에 잠깐 여의도에서 일을 도와줄 때, 모니터 앞에서 시린 눈을 꿈뻑이며 날잡고 쭉 좋은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군대에서 휴가나가면 먹고 싶은 음식 생각을 하듯이 나는 그 시간이 지나면 읽고 싶은 책들에 대해 생각했다. 우선은 운동권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맑스에 대해서 많이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또 그렇게 8,90년대에 행해진 '학습'이 아니게 맑스를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는 것 역시 알았다. 8,90년대의 표준적-과학적, 그러니까 교조적 맑시즘에서는 독일 이데올로기같이 철학적이고 난해한 작업들에 대해선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 나는 신물나게 '정치경제학'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건 물론 맑스-엥겔스가 이야기하는 과학적 사회과학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맑스의 '경제결정론'적 해석을 암시하는 레토릭일 뿐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연구실에 들어와서 맑스를 읽게 된 방식은 그 반대의 지점이었다. 정통 맑스주의자들이 아니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서구의 맑스주의자들로부터 윌리엄스에 이르는 이들처럼 나는 문화적이고 상부구조를 중요시하는 해석들을 배웠다. 그러므로, 내가 사무실에서 계속 읽고 싶었던 글은 독일 이데올로기였다. 그냥 상상해보자면 아마 서유럽에서 제일 인기있는 맑스의 글을 뽑자면 독일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싶다…


 맑스에 대한 아이디어와는 별개로 그 분들로부터 김훈을 알게 된 건 다행인 일이다. 올겨울 접한 남한산성의 문장들은 내게 제법 곱씹을 거리를 제공해주었다. 그 소설에 대해서는 추후에(기약할 수 없는) 또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때 또 읽고 싶었고, 또 아직도 읽지 못한 글은 나보코프이다. 가을에 겨우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읽었을 뿐, 나보코프의 소설 세계에 어떻게 접근해야할 지 아직도 감이 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나보코프라는 이름보다 '로리타'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지 않나 싶다. (책을 많이 읽은 분이라면 웃기겠지만) 로티의 책을 보면서 그가 한 장을 할애한 나보코프라는 이름의 작가를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로리타와 연결시키지 못 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그 책에서 하버마스에 대한 언급보다도 나보코프를 예시하고 분석하는 부분이 나는 더욱 난해했기에, 나보코프라는 이름은 내게 다가갈 수 없는 먼 산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나보코프에 대해 다시금 호기심이 샘솟는 날이 찾아왔는데, 누군가 pgr에 가디언인가, 영국 매체가 가장 섹시한 소설의 도입부 50선인가 100선을 모아둔 것을 올렸고 나는 거기서 두 문장에 확 꽂혔더랬다. 하나는, 

“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라는 안나 카레니나의 도입부이다. 위대한 소설이기에 나의 끌림은 아주 자연스러웠으리라. 톨스토이를 이어서 스크롤을 쭉 내리다가 나는 낯설고 매혹적인 문장 하나를 만났다.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ee-ta: the tip of the tongue taking a trip of three steps down the palate to tap, at three, on the teeth. Lo. Lee. Ta." 


이 얼마나 재기넘치는 문장인가. 미국문학에 일천하고 영어실력이 아주 저질인 나에게도 이 문장은 "어머 저건 질러야해!" 라는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오늘 빌린 로리타의 1997년판 표지는 이렇다. 



열심히 읽어서 다음번엔 같이 로리타와 나보코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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