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값으로 그냥 내가 쓸 페도라를 하나 샀다.
용산을 돌아다니다가 그게 예전에 함께 걸었던 길이란 것을 눈치채고는 슬퍼져서는
그냥 선물값으로 내가 쓸 페도라를 하나 샀다.

이제 여행까지는 8일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그중 하루는 바쁠테니 빼고 나면 일주일.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을 손에 꼽아보았다. 그리 많진 않지만 그래도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면서 생각해본다.
그리고 볼 수 없는 사람들만큼 손가락을 펴보면 어느새 한주먹 가득 찼던 나의 '보고픈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 별로 없는 나의 보고픈 사람들이 나의 청을 거절하지 않는다면 좋겠다.
M이 내게 준 가장 큰 변화는 상처를 당할만한 일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게 만든 것,
너무 많은 거절에 너무 지쳐서 별로 많이 있지도 않은 내 보고픈 사람들에게조차도 연락하기가 두렵다.

두려움은 사람을 시작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주저앉혀버리는게지.
나는 M에게 무릎꿇려서 어찌 일어나야하는지 어찌 걸어야하는지 걸음마를 다시 배워야하는 참이다.
그래서 (가끔은 나를 일으켜줄 것도 같은)Z에게 줄 선물을 살까ㅡ하다가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집에 주저앉아 버렸다.
가끔 나의 결단은 상황판단에 좌우되는 편인데 나는 이번 경우는 솔직히 의지를 뒷받침해줄 확신이 너무도 적다.
시간이, 과거의 긴 겨울에서 겨우 기어 나온 이 짧은 시간이 내게 그것을 줄 수 있을지.

기아는 3:2로 광주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어떤 여대생들은 미팅 10번을 채우고 이제 인위적인 만남은 안 되겠다는 성찰에 대해 토의했으며 605번 버스에서 어느 여학생은 1시간 내내 내가 싫어하는 하트브레이커를 들었고 시그마를 들고 있던 어느 노인이 내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았으며 결심했던 철야예배에 나가지 못했고 Z를 만나려 했으나 못 만났고 J선배는 낮술에 취했고 내가 화장실에 간다고 나와서 작별인사도 못한 나의 친구P는 사커라인을 보고 있을 것이며 남자 후배M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을게고 허리가 아픈 나는 콩알만큼 방에 쿡 점박혀서 어디론가 빨려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사진은 글의 내용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냥 나도 다른 의미에서 행불자가 아닌가해서)

' > L'Ecume Des Jou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월 6일, 질문  (0) 2010.04.06
여행을 앞두고.  (0) 2010.04.05
3월 30일  (0) 2010.03.30
싫어해, 싫어해.  (0) 2010.03.29
z와의 재회  (0) 2010.03.25

오늘따라 유난히 싱싱한 나물이 먹고 싶고
뒷산에서는 괭이가 춘정에 못 이겨 울부짓고 있다.

' > L'Ecume Des Jou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행을 앞두고.  (0) 2010.04.05
4월 2일, 남은 시간동안 무엇을 해야할까고민하며 써내려간 글  (0) 2010.04.02
싫어해, 싫어해.  (0) 2010.03.29
z와의 재회  (0) 2010.03.25
모래로 만든 남자  (0) 2010.03.25

나는 실은 고집이 세고 시기심이 강해서 무언가를 싫어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말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
누군가 나를 합당한 방식으로 잘 타이른다면 쉽게 그것을 철회하기는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혐오하는 감정이 강하다고해서 평소에 많은 대상을 미워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의 미움은 넓진 않지만 매우 깊다는 점이다.

나는 자기 완성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서 항상 나 자신의 단점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몹시 미워한다. 나의 미움의 첫 지점은 나 자신인 셈이다. 때문에 나 자신을 커버하기 위해서 남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의지하는 상대가 나의 단점을 갖추고 있을 경우에, 그리고 그 단점을 나보다 심하게 갖추고 있을 경우에 내 미움은 그 사람에게 전이되고 확대된다. 그래서 나는 님의 그 찌질함과 촌스러움, 항상 과잉표출되는 감정, 비굴함을 미워하는 것이다. 아주 뻥안치고 바퀴벌레보듯이 당신을 미워한다. 이런 결벽증이 내 단점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님을 미워한다.

때문에. 나는 항상 싫어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부던히 노력하고 있음을 알아달라!!!결국 이 글의 결론은 이것이다.ㅋㅋ
더 쓰면 정말로 그럴 거 같아서 더이상 못 쓰겠구만. 빌어먹을.

' > L'Ecume Des Jou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월 2일, 남은 시간동안 무엇을 해야할까고민하며 써내려간 글  (0) 2010.04.02
3월 30일  (0) 2010.03.30
z와의 재회  (0) 2010.03.25
모래로 만든 남자  (0) 2010.03.25
3월 24일  (0) 2010.03.2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