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이것,



어느 분이 친절하게도 60fps로 올려주었더라.

광기어린 권력의 미칠듯한 자의성, 공포, 김영철의 연기 등이 정말 깊게 뇌리에 남는다.

궁예란 캐릭터도 매우 흥미로운 인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저렇게 인상깊게 연출한 건 대단하다.

지금 왕건이란 드라마를 생각해봤을 때 가장 생각나는 캐릭터는 궁예아닐까. 아님 수달이가 죽었어 같은 장면…

가끔 보면 한길속을 알 수 없는 궁예의 마음과 그 앞에 공포에 떨고있는 신료들의 마음을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합성물들도 ㅋㅋㅋㅋ)

러시아 음식점에 가면 머나먼 땅에서 오랜 시간을 떨어져 산 고려인 동포들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민족에 본질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을 지나도 여전히 같은 음식을 먹고 있는 건 조금 신기하게 다가온다.

강제이주를 당했을 때 고려인들에게 붙은 별명이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지금에는 오히려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게 사라져가는 식문화로 여겨지는데, 고려사람들은 여전히 개고기를 좋아한다니 참 묘한 일이다.

러시아 음식은 드넓은 땅에 사는 무수히 많은 민족들, 정주민족, 유목민족, 유럽인, 아시아인 모두 모여 만든 음식인데,

그중 개고기, 특히 개장은 고려인들이 러시아음식에 추가한 메뉴이다.

애초에 '개장'이라는 말 자체가 여전히 한국에서는 개고기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니까…


*

*

개장을 시키면 익숙함과 동시에 낯섬을 느낀다.

간과 향을 맞추기 위해 소금과 이런저런 소스들을 주는 건 한국과 같다.

다만 그 소스가 우리가 익히 한국에서 보던 것들과 다르다.

특이한 건 미원을 겁나 많이 준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정체를 모르는) 향신료 하나, 마늘 팍팍,

가장 고려인 개장의 포인트는 고수를 넣는다는 점이다.

같이 간 고려인 분이 그러더라. 팍팍 넣으라고 팍팍.

*

처음엔 맑은 국으로 나온다. 개고기를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고기와 질감은 비슷하다.

국물을 떠먹어보면 의외로 향을 잘 잡아서 훌륭한 느낌이 든다.

개고기 요리의 포인트는 개고기의 향을 잡아내는 것이니까.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향이 잡혀있다.


*

맑은 국의 상태로 먹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다데기를 넣어야지.

일단 주어진 고명을 다 넣는다. 마늘 팍팍, 깨도 넣고, 소금, 매운소스, 향신료 등등

그런데 의외로 간을 맞추는게 쉽지 않다.

으음 평소 소금을 많이 치는 편이 아니라 살살살 넣으니, 같이 가신 분이 팍팍 넣으라고 하신다. 

러시아 음식들은 간을 팍팍 해야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고수를 아주 잘 먹는 편은 아닌데, 고수와 어우러지는 맛이 있었다.

맛있으면서도 뭔가 위화감이 들고, 그렇다고 고수를 넣지 않으면 맛을 주는 포인트가 사라지고…


 그러므로 개장은 분명 한국음식인데, 한국음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먹을 순 없었다. 

같이 일하는 고려인 선생님이 생각났다. 젊은 여자분인데 국물을 아주 좋아하시고, 특히 개장과 개고기를 좋아하신다고 했다.

성적인 편견이나 고리타분한 견해를 설파하자는 건 아니고, 한국문화에서 보통 여자들이 개고기를 잘 안 먹는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개장을, 순대국을 열심히 먹는 선생님의 모습은 늘 신비롭게 느껴진다.


같으면서 다름, 다르면서 같음은 아닌 것 같다. 같으면서 다름에 가까운 것 같다.

아, 음식포스팅에서 중요한 점 맛. 맛은 의외로 심심할 정도의 깔끔진 맛이다. 가격이 한국 영양탕에 비하면 싼 편이기도 하고…

마음으로는 추천하고 싶지만, 일반적인 초이스는 아닐듯하다.

"… 모든 합의적인 논의, 즉 진리 탐구를 위해 바쳐진 모든 논의는 원리들, 사실상 윤리적인 원리들에 기초하고 있다. 나는 그것들 중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1. 오류가능성의 원리. 아마 내가 틀렸고 어쩌면 당신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모두 틀릴 수 있다.
2. 합리적 논의의 원리. 우리는 비판적으로 그리고 물론 논쟁 중에 있는 다양한(비판할 수 있는) 이론들을 가능한 한 개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시험할 필요가 있다. 
3. 진리 근접성의 원리. 우리는 거의 언제나 그런 비판적 논의들의 도움으로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항상 합의에 도달하지 않는 경우들에서도 우리의 이해를 개선할 수 있다.

이 세 원리들은 인식론적이며 동시에 또한 윤리적 원리들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여타의 다른 것들 중에서 이것들은 관용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너한테서 배울 수 있다면, 그리고 만약 내가 배우고자 한다면, 그러면 진리를 위해 나는 당신을 관대하게 대할 뿐만 아니라 당신을 가능한 동등한 자로 여길 것이다. 인류의 잠재적 통합이나 모든 인간의 잠재적 평등은 우리가 기꺼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선결조건들이다. 우리가 어떤 토론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원리는 더욱 중요하며, 심지어 그 논의가 합의에 이르지 않을 때라도 그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논의는 우리의 몇 가지 오류들에 대해 빛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크세노파네스:그의 위대함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 칼 포퍼

한참 벡이나 바우만을 읽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서 도서관에서 칼 포퍼를 빌렸다. 안산 중도에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조차도 없어서 주문했는데 의외로 『파르메니데스의 세계』가 있어서 빌릴 수 있었다. 이 책에서 포퍼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그리스 과학이 얼마나 창조적이고 위대했는지 감동적인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포퍼가 봤을 때 밀레토스 학파의 과학자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에 이르는 그리스 과학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물리학의 발견을 예견하고, 그 방향을 선결하고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관찰과 이론의 선후관계에서 당대의 경험주의자들은(물론 후기경험주의는 전혀 다르지만) 귀납적인 과정을 통해 이론이 성립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포퍼의 생각은 그것과는 달랐다. 포퍼는 사고(그러므로 전적으로 철학적이면서도, 삶과 유리되지 않은)를 통해 연역된 가설은 틀릴 수도 있지만, 중요한 점은 그것을 비판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진리에 다가가는 그 과정이 과학이라 생각했다. 그리스 과학자들이 위대했던 점은 “제자들에게 비판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학설의 대담한 변화가 금지되지 않는” 합리적인 전통을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포퍼에게 있어서 과학은 단순히 실증적인 도구라거나 게임(후기 경험주의에서의)이 아니라 합리적인 전통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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