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덜렁대는 걸까.
뻔히 29일날까지 제출하라는 문자를 보고도 그걸 혼자서 30일로 생각하고 있던 내 사고가 나도 궁금하다.
어떤 원리로 나는 29일이라는 글자를 보고 30일로 그것을 기억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내가 제대로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해도 글은 완성하지 못 했을 가능성이 크다.
존경하는 교수님께 내는 페이퍼니, 조금 늦어도 더 짜임새 있게 글을 써야지.
그리고 가급적이면 여기에다가도 간추려서 올려놓는 것을 목표로 하자.




내가 쓰고 싶은 주제는 마페졸리의 <영원한 순간>의 한 부분에 대한 비판적인 보완으로서 시간과 정치적 변화에 관한 것이다.
마페졸리는 뒤랑의 "밤 체계"에 속하는 여러 상징이나 비유들을 통해서 포스트모던한 사회의 측면들을 그려가고 있는데,
그의 글의 문제는 그 포스트모던한 사회라는 게 어디에 존재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본문에서는 단순히 "~하고 있다."라는 서술로 회피하고 있는 점에 있다.
특히나 포스트모던에 대한 많은 서술에 있어서 전통과 관습의 문제는 포스트모던한 사회이론이
복고를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게끔 만든다.

"순간이 도래한다."
이 말은 과거에서부터 지속되어오던 운동의 발현인가, 아니면 현재가 향하고 있는 미래에 속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인가, 또 그것을 담지할 주체는 누구인가.

 나는 그래서 고대와 중세의 정치사상,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마키아벨리로 이어지는 정치사상에서
시간이 초래하는 불확실성 속에서의 정치적 주체의 문제를 다룬 부분들을 살펴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에게 있어서 정치적 행위란 선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정치적 결사체들은 각각의 선을 조율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최고선으로서의 국가는 이러한 개별선들을 보편적인 차원으로 '들어올리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그 보편적인 선의 표상으로 존재한다. (아테네적 상황에서) 개인들은 개인을 통치하며, 동시에 통치에 속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에티우스에 있어서 사정은 조금 더 복잡해졌는데, 그리스도교의 교의는 세속적인 가치보다는 구원과 내세에서의 행복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현세적인 삶을 추구하는 시민적인 삶vivere civilie과 기독교도로서의 삶을 조화시켜야할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을 이용해서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은 (마치 이데와와 같은) 참된 본성을 회복시키는 데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러자면은 신도는 자신의 참된 본성을 인식해야하는 데, 그 인식의 힘은 지혜이며 이는 지식과 이성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것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참된 시민권은 바로 그리스도의 심판 이후에 올 신국Civitas Dei의 시민권을 얻는 것이다. 그것을 실행하는 수단은 세속적인 시민의 덕목보다는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하는데, 그 삶의 가치는 바로 애덕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사랑은 그저 하는 게 좋은 게 아니라, 반드시 그것을 해야하기 때문에 해야하는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을 통해서 왜 신은 의로운 자에게 그가 겪은 것과 같은 고난을 베풀고 반대로 악한 자들이 권세를 얻고 폭압적인 정치를 행하게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나타난 여신인 철학(중세철학에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로 표상된다)은 그 유명한 운명과 덕의 대비라는 테제를 제시한다. 철학에 따르면 운명의 여신이 하는 일은 공평무사하고 원망할 것이 없다. 운명의 수레바퀴에 올라탄 사람은 반드시 그가 올라간 위치만큼 떨어지게 되어 있고, 사람이 얻는 모든 명예와 행복들은 원래 운명의 여신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서 그것의 소유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은 불완전한 자산일 뿐이다. 따라서 운에 의해 얻는 행복보다는 보다 완벽한 차원의 행복을 인간은 추구하는데, 그 행복의 목적은(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선이다. 따라서 행복해지기 위해선 부나 명예와 같은 불완전한 선보다는 완벽한 선을 추구해야하는데, 결론적으로 완벽한 선은 신과 동일하다(완전함이라는 의미에서). 신은 심지어 불운조차도 그의 역사에 이용하는데 그의 작용은 감각이나 이성으로 인식되는 차원보다 더 높은 이지(理智)의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현재에도 영원한 시간들을 한 순간에 종합하는 완전한 감독자인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울만이 지적하듯이 중세정치사상사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에티우스의 관조하는 관점과 동시에 종말론과 천년운동의 관점 역시도 강력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 연구에서 가장 널리 수용되고 있는 사실은 15세기 피렌체가 밀라노 비스콘티가의 투스카니 점령 시도라는 위기상황을 맞아 공화국과 시민적인 자유라는 아이디어에 눈을 떴다는 점이다.그 전 시기까지 과두정에 가까웠던 피렌체에서는 15세기에 메디치가라는 군주와 평민popolo이라는 두 정치세력이 등장한다. 프랑스왕의 이탈리아 침공 이후 등장한 사보나롤라는 타락한 도시에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역설했는데, 여기에서 바로 영원한 질서로 표방되던 그리스도교 질서와는 다른 세속적인 '쇄신'이라는 문제가 제기되게 된다. 보편적인 신의 구원사와는 별개로 개별적인 도시에서의 부패한 질료를 어떻게 개혁해나가고, 또한 필멸할 공화국이 처한 불확실성 속에서 어떤 정체를 택함으로써 운의 횡포를 이겨낼 것이라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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