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요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막 마음에 안 들고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게 요조의 노래는 너무 기능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우울하거나 그냥 알콩달콩한 노래 듣고 싶을 때 딱, 요조의 노래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러므로 이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앨범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제목인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 였더라"를 본 후 나는 내심 이 앨범도 그냥 귀염귀염하게 부르는 노래겠지, 뭐 끽해야 일상적이고 친근한 감성을 일깨우기 위한 작업이겠지, 이렇게 생각하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올 가을까지만 해도 요조는 내게 딱 그 정도였다.

그러나 트위터에서 이 노래,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를 접하고 나는 충격에 빠졌다. 아니, 요조에게 이런 노래가 있다니. 사운드도 꽤나 괜찮고 말이지. 아니, 이상순? ..그 이상순 말인가? 요조는 싫어하겠지만 나는 자연스레 옛 연인 이상순과 요조의 연애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대로) 이 앨범을 이해하게 되었다.

 

음, 이 노래는 두 대의 어쿠스틱 기타와 남과 여의 목소리가 있고, 그것들의 조화가 있고, 조화를 가능케하는 마법같은 감정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 나는 음과 가사 저편에 있는 그 감정들과 기억들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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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사항은 네이버를 검색하면 많이 나오니 그냥 감상평만 적고자 한다.

전람회의 그림은 음악이 인간의 정서를 얼마나 잘 표현하고 그것을 다스리는 지 보여주고 있다.
무소르그스키는 소품 하나하나를 통해 그것에 해당하는 인생의 한 단편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표현의 호소력이 너무 뛰어나서 듣다보면 음향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피아니스트, 그리고 작곡가와 만나는 느낌이 들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 곡은 청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호소력이 아주 강한 곡이다. 아주 매력적인 곡이란 말이다.
두번째 곡부터 딴 생각할 틈 없이 우리는 무소르그스키가 제시하는 풍경 속을 여행하기 시작한다.

중세의 오래된 성, 한적한 러시아의 벌판, 궁전, 기기묘묘한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마치 안개속으로 사라지듯 멀어진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을 타고 한참을 움직이던 우리는 기어이 러시아의 고도 키에프의 대문으로 들어가는데
그 성은 아주 웅장하고 마치 개선하는 것마냥 밝은 날에 환희만이 가득하다. 그것을 보기 위해,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소르그스키의 길고긴 여행에 동참한 셈이다. 마치 몇일동안 산과 들을 넘어 도착한 라닥처럼 그것은 반짝반짝 빛난다.

여행의 막바지에서 청자가 느끼는 그 느낌을 카타르시스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한껏 울고 운 것처럼 마지막 곡의 경쾌한 타건은 먹먹한 가슴을 뻥 뚫어버린다.
무언가 맺혀있던 것이 박살나고 청자는 마치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나온 것 같은 느낌에 휩싸인다.
전람회의 그림이 천착한 '효과'는 다음 세기의 시각예술들이 보여주는 '효과'를 앞서 보여주고 있다.
원래 그림이었던 것이 음악이 되고 그 속에서 영화가 탄생하는 위대한 여정이랄까.

Modest Mussorgsky (1839-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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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주의자란 무엇을 뜻하는가. 혹은 과거로의 회귀를 꾀하는 인간정신은 무엇인가?
우리는 브람스를 두고 복고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프로코피에프의 고전교향곡의 훌륭함이 과거로의 회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부르디외는 문화자본에 대한 언급에서 정통문화, 특히 클래식에서의 정통에 관한 문제를 다룬바 있다.
문화자본에 있어서 스스로에의 의식에 경도된 자의 예술관은 형식에 점점 모든 가치를 집중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의 예술은 점점 실제와 멀어지게 된다.

La Valse, 왈츠곡은 단순히 라벨의 향수에서 나온 곡은 아니다.
아방가르드의 대가였던 라벨의 이 곡은 과거의 형식과 과거의 정신에 보내는 추도사와도 같다.
라벨이 이 음악에서 보여주는 세련됨, 형식의 능수능란함에 현혹되어 그것을 라벨의 향수로 해석하는 점은 옳지 않다.
중요한 것은 라벨이 낡은 형식의 새로운 표현, 낡은 형식을 (부숴서) 마음대로 부리며 보여주는
"그것이 이미 죽었다"는 그 선고가 중요하지 않을까.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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