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니 어제구나 17일은 너무너무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가끔 너무 생각이 많아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데 어제가 딱 그런 하루였다. 그런 날은 또 묘하게도 생각할 시간은 더럽게 많지...

싸구려모텔의 꽃무늬 벽화를 보며 나는 일어나기가 너무너무 싫었다.
그 전날의 술자리와 언쟁에서 내 감정과 모든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어 버려서 누워서 그냥 하루종일 쭉 뻗어버리고만 싶었다.
그러나 하필 구해지지 않은 알바 대타. 또 학교로 가서 알바를 시작하면 밤까지 집에 못 온다는 생각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오늘도 4만원의 유혹에 못 이겨 학교를 갔다. 그래서 정말 점심부터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일하고, 잠깐 공부하고, 진정제처럼 음악을 꾸역꾸역 투여하니까 하루가 정말 순식간에 갔다.
그것때문에 또 기분이 더러워.
언능 집에 가고 싶어서 학교에서 내려왔는데 아니 글쎄 신촌역에 가서야 내가 지갑을 두고왔다는 사실을 발견.
그래서 꾸역꾸역 학교에 다시 가니 땀이 비오듯이 쏟아져서 다시 신촌역으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기로 결정하고 여의도로 갔는데 글쎄 여의도로 가는 버스를 20분, 안산가는 버스를 30분 기다렸다.
버스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또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그 찰나에 인도에서 I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까지 한번도 해본 적 없는 I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금 그 썰을 풀지 않으면 도저히 편하게 잘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내 인도여행의 최종목적지이던 레에 가기 위해 들린 스리나가르의 버스정류장에서 I를 만났다.
레로 가는 도로의 특성상 버스의 한쪽 면은 계속 절벽을 보고 달리게 되고 한쪽 면은 설산준봉과 그림같은 계곡들을 지나가게 되어있는데
니콘 D60을 든 I는 미리 자리를 잡지 못하고 버스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내심 I가 내 옆자리에 앉길 바랬는데 정말로 I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고 나는 두근거렸다.
I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녀가 프랑스 사람인줄 알았다. 신기하게도 그땐 얼굴이나 풍기는 분위기로 정말 유럽사람들의 국적을 맞출 수 있었는데 작은 키의(서양인들 기준에선) I의 갈색머리와 천진난만함은 내게 그녀가 프랑스사람이냐고 물어보게 된 이유였다. 그녀는 웃으면서 자기는 루마니아 사람이라고 말했고 내게 가끔씩 창밖의 풍경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때부터 쭉 이야기를 나누면서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묘하게 그때 나는 정말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영어실력을 발휘했더랬다.
 라마유루에 도착했을 때 그간 위태위태하게 오던 버스가 기어이 고장이 나버렸고 다음 버스가 올때까지 그곳에서 무한정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활달한 I는 버스가 멈춘 곳에서 2km정도 떨어진 라마유루 곰빠에 가보자고 그랬고 마침 따분해 죽을 지경이던 나는 흔쾌히 okay라고 말했다. 라마유루에 함께 갔던 데이트는 처음 라닥에 도착했을 때니까 정말 모든 것이 환상적이었다. 창공은 수정같이 푸르고 그 아래 나무 한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의 절벽위에 라마교의 깃발만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I는 라마유루에서 하루 머물다 갈 것을 제안했고 나는 역시나 흔쾌히 okay. 결국 같이 가기로 했던 프랑스의사선생님의 도난 사건으로 인해 라마유루에는 머물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 일로 인해 우리는 레에서도 일행이 되었다.
 그리고 레에서의 5일. 결코 마냥 좋기만 했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우린 달라도 너무 달랐고 또 나의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인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또 우리의 다른 관심사, 레의 한국사람들과 계속 관계를 유지해야했던 내 사정, 그리고 내 감정때문에 힘들었던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날들은 마치 꿈만 같았다.


쓰다보니 그 이야기들을 다 쓰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실은 그냥 나만 꼭꼭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라서.
다시 현실로, 다시 안산으로 돌아가야하는 순간이 왔다.
나는 그 노선이 내 심보마냥 배배 꼬인 5601번 버스 앞자리에서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나의 어두운 미래를 보았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머리를 창문에 박아댔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어서 글을 쓰고 싶었는데 버스는 자꾸 이상한 동네로 돌아가고 뒤에 앉은 아저씨는 버스가 덥다며 궁시렁대고 있었다. 나는 I의 얼굴을 그렸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누군가를 생각했다. 그네들은 이제 내 삶에서 저 멀리 별이 되어버렸고 우리는 그 별들의 운동마냥 미친듯한 속도로 멀어져가고 있다. '새의 선물' 마지막이 떠올랐다. 시속 120km의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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