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고대병원에 가서야 나의 질병의 정체는 밝혀졌다.
아, 뭔가 아무런 질병도 없는 상태에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 속담에도 나오는 질병으로 아주 끈질겨서 한동안 치료(라기엔 뭔가 할 게 없어!)에 전념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최악이다....

잠깐 돌아다녔을 뿐인데 알러지 약은 나를 또다시 잠에 빠져들게 한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잊어야할 얼굴을 꿈꾸고 땀에 흠뻑 젖은 채 어렵사리 눈을 떴다.
이웃아파트 어디에선가 모녀가 지독하게 싸우는 소리, 위층 어디에서 피아노 연습하는 소리, 애들 노는 소리,
다 멀리서 들려왔지만 내 발 끝에서 모두 독을 먹은 듯 죽어버렸다.
나는 이 좁은 땅에서도 한 소도시의 아파트 방 속에 작은 점 하나로 콕 움츠린 채로 죽어가고 있는가-

미칠 거 같아서 슈베르트를 다시 들었다.
모짜르트, 베토벤같은 사람들이 인간의 냄새를 벗어났다면 일평생 질병과 고독에 시달리며 살다간 슈베르트의 음악은
우리네 삶에 비교적 대입시키기 쉽고 어렵지 않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음악이다.
나는 미칠 듯한 고뇌 속에서 투쟁하는 운명 속의 영웅은 아닌가보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마냥 소박하다는 것은 아니다.
현악5중주곡 D956같은 작품은 정열이 꿈틀대는, 슈베르트의 젊음(비록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곡이다. 슈베르트가 어느 계절에 이 곡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곡을 들으면 뭔가 터질듯한 여름밤의 정취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성 싶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피부 속의 가려움과 습기, 외로움들도 이 곡을 들으면 그 열기에 모두 녹아 한잔의 즐거운 술로 화해버리는 것만 같아 나는 지금 슈베르트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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