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하루종일 내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다니다가 나는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게 아니라 사진에 대해서 생각하러 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찍을 수 있는 소재는 한정되어있고, 더군다나 나는 어떤 소재가 작품 자체를 규정하는 방식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좋은 사진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혹은 이 질문에 대해서 일단 가정을 내리고 사진을 찍는 게 유익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을 찾고 싶고, 찾아야만 한다. 이게 내 병증이다.

매사 이런 성향으로 접근하는 게 나의 병증이다.

가령 인생을 살기 위해 좋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이론을 세워야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지적으로 만족스러운 이론과 답을 얻고 싶다.

만족스럽다는 말에 내재되어 있듯이 만족스러운 답은 지적으로 잘 짜여진 이론이자, 쓸모있는 해결책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하고 있듯이 잘 살기 위해 이런 답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며, 혹은 잘 살기 전에 이 답을 안다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나는 경험으로 완성시켜야할 지식에 대해 선험적인 틀을 먼저 요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튼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서,

그나마 사진은 삶이나 세계에 비해서 요구하는 진리의 수준은 훨씬 소박하기 때문에 위안이 된다.

아마도 사진에 대한 철학, 사진에 대한 사회학은 전체 이론의 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통로를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시도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확실한 시각적인 정보를 통해 진리에 접근한다는 주장은 우리를 다시 진리에 대한 명석판명한 관념을 얻고자 했던 데카르트의 시도로 회귀하게 만든다.

그것은 낡고 가망없는 길이다.

나는 다만 사진에 대해서 기록적인 가치만 인정하고자 한다. 그 기록은 전체 역사의 사소한 부분이겠지만 인류학적인 가치를 가져야한다.

사진의 인류학적인 가치에 대해서 나는 "망각에 대한 투쟁"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용어를 빌리고 싶다.

이 말은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인식적 가치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한 말이지만, '기록'과 역사적 인식에 기여하는 측면에서 사진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진은 영원히 즉물성에 묶여있는 매체이지만, 오히려 그 즉물성은 사진이 탈역사적이고 선험적인 형이상학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준다.

소박하게 내가 찍는 사진들은 그런 작은 기록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곧 사라져버릴 기억들에 대해서 나는 기록하고 있으며, 그 대상들이 사라져버려야하는 이유에 나는 암묵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그냥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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