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다소 거창하지만, 이미 밤이 늦었으므로 딱 지금 구하고 있는 Goldberg Variations가 완료되는 순간까지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자. 짧고, 아주 절박하게.

밤은 짧아지고 내 얼굴은 보다 어두워지고 있다. 나는 나를 모욕하고 나에게 화내고 나에게 짜증내고 싸우고 그리고 다시는 화해하지 않는다. 책을 읽을수록 도서관에 유폐된 내 현실이 한탄스럽고 이 땅이 너무 좁고 아무 냄새도 노래도 들리지 않는 서울이 지겨워서 여러가지 꿈을 꾸고 그것을 그려보지만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뭔가 현현할 것을 꿈꾸고 있나보다. 아니면 회오리바람이 나를 먼 곳으로 데려다주길, 하필이면 어두침침한 덤불속으로 무언가 굴러가기를, 환란이 일어나 내 실업상태가 해결되기를, 굶주림속에서 깨달음 비슷한 것이 일어나기를, 나를 데려가줄 사람을 발견하기를, 혹은 내가 꿈을 꾸고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 되어있기를 나는 기대하고 있나보다.

"이 빌어먹을 나라에서 당신 같은 사람이 글 쓰는 것 외에 달리 뭘 할 수 있겠소? 나는 당신이 달리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단지 무력감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소. 아, 난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이 겪는 그 속수무책의 추억에 대해 괴로워했던지!"

"왜냐하면 인생만큼 경이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그렇다, 물론, 유일한 위안거리인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온갖 오욕감과 피로에 지친 고개를 팍 숙이고 냄새를 잘 맡는 개마냥 킁킁 삶의 이유를 반추해본다. 그렇다고 죽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죽어야할 이유가 없는 것만큼이나 내가 지금 이 세상에 던져진 이유를 찾는 것 역시 어렵다는 이야기다. 사막에서 관광객들이 던져준 먹이를 수km의 모래바람을 뚫고 입에 문 인도의 개들마냥 그 이유를 찾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정의를 위해서 산다고 할 때 나의 정의는 무엇이 될거냐. 정의를 알면 그것을 믿어야되는데 나는 내가 정의라고 생각한 것들을 믿을 수 없다. 어렸을 때처럼 내가 마냥 착한 편에 서서 살 수는 없다는 점을 날이 갈수록 통감하며 오히려 내가 나쁜 놈이라는 증거를 찾기 더 쉬울 것이라 짐작한다. 내가 나쁜 놈일진대 이 세상에 득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거꾸로 내가 이 세상에 득이 되는 것이랑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떤 도덕적인 강제력을 가질 수 있을까. 남을 위해 살아야한다는 것 역시도 아주 임의적인 설득방식일 뿐이다. 가장 편한 것은 신에게 그 모든 이유를 의탁하는 것인데... 인간을 떠난 신은 존재하는지?

편하게 생각하면 나는 죽을 용기가 없어서 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현재 상태를 서술하는 거지 이게 꼭 사는 이유라고는 볼 수 없다. 같은 말을 반복하며 설득하려는 것과 같다. 너는 살고 있기 때문에 산다, 뭐 이런식?

딱한 처지일세. 검은 책마냥 거울 앞에 내 얼굴을 들이대면 코와 볼의 살이 ㅊ 과 눈의 모양이 ㅂ를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비참을 뜻한다는 것을 쉽게 유추해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내 팔에는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나 냉장상태로 우리집에 온 닭의 껍질마냥 알러지가 돋아나고 있는데 이 속에 감춰진 글자는 ㅇㅇㅇㅇㅇ지금 니가 하는 말들에 동의한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Goldberg Variations를 구했으니 이만 해야겠다. 바흐선생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의미를 스스로의 기술 안에서 인식하고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를 소망한다.

*<검은 책>, 오르한 파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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