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브 바커는 나까지 공포에 떨게 만든다. 그의 책으로 인해 우리는 지난 십 년 간의 잠에서 꺠어난 것 같다. 어떤 단편들은 너무도 오싹해서 읽을 수 없었고, 또 어떤 단편들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공포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클라이브 바커, 그는 호러의 미래다." -스티븐 킹


공포문학계의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한다. 84년에 클라이브 바커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소설집.
"피의 책"부터 시작하여 총 9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스티븐 킹은 공포로 인해 몇 단편들을 읽을 수 없었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건 다소 과장이라고 생각한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고 계속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공포소설이나 공포영화가 주는 쾌감은 제의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공포의 영역에 희생양들처럼 우리의 주인공들을 쭉 밀어놓고 그들의 운명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와 같은 위치에서부터 얼마나 떨어졌나 가늠해보고(그 높이가 공포의 강도를 보여줄 것이다.) 공포에 떨고 마음껏 상상하다가(이게 두려우면 이쪽 장르를 잘 안보게 되겠지.) 책을 덮고, 혹은 영화가 끝나고 안도하는 것이다. 어떻게보면 공포장르는 비극의 한 분야라고도 볼 수 있겠다. 카타르시스의 또다른 부분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쪽 소설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집이 훌륭한 것은 우선 충분히 몰입할 수 있도록 재밌고, 그 상상의 영역이 굉장히 넓으며, 하나같이 파멸하기 때문에 혹시나라도 잘 될까 생각하는 독자들의 무모한 상상을 부숴버린다는 것이다. 끝없이 추락하는 인간들은 운명에 휩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부서져버린다. 만약 스티븐 킹이 정말 너무 무서웠다면 클라이브 바커가 제시한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것의 운명을 관장하는 그 무언가에 상상이 미치지 않았을까...그런 생각을 해본다. 잔혹한 묘사보다는 인간의 의지가 정말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경우가 진짜 공포가 아닐까...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나름 애를 쓰지만 인간을 먹는 존재의 대리인으로(미트나잇 미트 트레인), 돼지의먹이로(피그 블러드 블루스), 언데드로(섹스, 죽음 그리고 별빛), 거인화된 도시의 한 부품으로(언덕에, 두 도시), 퇴행해버린 살인마로(드레드), 물귀신으로(스케이프고트) 하나같이 전락해버린다. 클라이브 바커가 서문에 말한, 삶의 빛에서 반대에 위치하는 어둠에 잡아먹혀버린다. '비교적'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는 "야터링과 잭", "로헤드 렉스"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은 온전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뒤에 제시한 소설들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괴물들이다. 괴물들은 제압당했지만 인간들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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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소개받은 하버드대 교수 앤드류 고든의 현대일본역사책.
어렵지 않게 일본의 근대사를 훑어볼 수 있다.
일본의 역사와 정치에 대해 관심있는 학생은 일독을 권한다. 

역시 미쿡인들은 책을 참 쉽게 잘 써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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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건에서 명성을 떨치던 복위표국이 어느날 가문의 비전인 벽사검보를 노린 사천 청성파의 습격을 받고 멸문당한다.
복위표국 임씨가문의 후계자 임평지만이 화산파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화산파 대제자 영호충은 성격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해 자신보다 무공이 강한 채화음적 전백광과 싸워 지모로써 항산파의 비구니 의림을 구해낸다. 그 과정에서 형산파 유정풍과 마교장로 곡양의 죽음을 목격하는데 이들은 음악을 통해 교제를 맺고 강호를 떠나려다가 오악검파의 맹주 좌냉선에 의해 중상을 입고 마지막으로 '소오강호곡'을 연주하고 영호충에게 그 악보를 전하고 최후를 맞이한다. 영호충은 명문 화산파의 제자지만 무림의 은원과 정과 사의 대립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된다.
이후 화산파에 돌아온 영호충은 의림을 구하는 과정에서 범한 과실들로 인해 천애절벽인 사과애에서 면벽을 명받는다. 그는 사부 악불군의 딸, 악영산을 사랑하는데 면벽때문에 멀어진 동안 새로 화산파에 들어온 임평지에게 사랑을 빼앗기게 되고 실의에 차서 지내던 도중에 사과애에 숨겨진 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오악검파가 마교에 굴복했으나 비겁한 술수를 써서 패배를 감춰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인과 사문에 대한 고뇌에 찬 하루하루를 지내던 도중 전백광이 사과애로 쳐들어오는데 이때 홀연히 나타난 화산파 선배 풍청양을 만나게 되고 최고의 검법 독고구검을 배워 전백광을 무찌르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벽사검보를 노리고 있는 악불군의 의심을 사게 되고 믿었던 사부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설상가상 지독한 내상을 당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데 낙양에서 우연히 마주친 마교교주의 딸 임영영은 영호충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


쓰다보니 의외로 방대한 스토리인 것 같다. 김용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특히 그중에서 신조협려와 소오강호를 많이 좋아한다. 이 두 작품의 주인공의 공통점은 재치있고 영특하고 쾌활한 성품에 강호의 법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의협심이 강하다는 점이다. 굉장히 융통성있고 자유로워서 망나니같은 모습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어기지 않고 오히려 가식에 찬 인사들이 외면하는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위험도 불사한다. 또 여자들에게 굉장히 다정하지만 한여자에 대한 순정은 잃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김용 소설의 주인공들은 여러가지 유형을 가지고 있는데 양과(신조협려의 주인공)와 영호충은 풍류를 즐기는 협객형이라고 볼 수 있다.

영호충은 부귀와 권세를 틀어쥘 기회가 많이 있었고 또 악행으로의 유혹과 불행이 많았지만 그 삶의 유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나는 이게 영호충이 금욕을 향한 강한 의지나 사상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그의 개인주의에 비롯되고 있다고 본다. 그는 기연을 얻어서(혹은 위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절세의 무공을 지니게 되지만 그것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애초에 무엇을 얻기 위해 능력을 추구한 게 아니기때문에 그 능력을 통해 무언가를 얻겠다는 욕구가 희박하다. 이를테면 영호충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어떻게 바꾸기 위해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저 그는 그의 사랑, 우정을 위해서 필요할 때, 그리고 그의 삶의 범위 안에서 그 능력을 쓸 뿐이다. 소설에서 영호충이 많은 사람을 돕지만 잘 보면 그것은 전부다 그가 보고,듣고, 아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초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전백광과의 대결에 있어서도 그가 의림이 납치당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지나치치 못하고 전백광과 대결하는 것이지 그가 채화음적이기때문에 애초에 그를 척결하기 위해 나선 게 아니라는 부분이 영호충의 삶의 방식을 대표하고 있다. 전백광은 악한이지만 그와 대결하다가 그의 사람됨에 반하고 친구사이가 되기까지 한다. 애초에 그에게 사파를 척결해야한다는 목표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의 삶은 무리한 목표에 희생되지 않으며 그 유연성을 간직할 수 있게 된다. 영호충은 굉장히 개인주의적인 협객이다.
소설에서 영호충의 관심, 그를 움직이는 이유는 굉장히 즉흥적이다. 그리고 그는 굉장히 감정적이다. 작품 초반에 그가 청성파와 시비를 붙는 장면에 나오는데 거기서 그는 상대파와의 마찰은 신경쓰지 않고 그쪽 사람들의 칭호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고 혼쭐을 내준다. 또 떠나간 사매를 잊지 못해 그리움이 끓어오를 때 바보짓을 여러번 한다. 사람이 맘에 들면 손해를 보더라도 하고 맘에 들지 않으면 그게 좋은 일이라도 절대 하지 않는다. 조금 과하게 말하면 그가 인물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의 기분은 거스르냐 아니냐에서 결정된다. 상대방이 무림의 높은 직위에 있든지 예의를 잘 차리든지간에 그의 성격에 상대방이 맞으면 오케이, 아니면 끝까지 아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영호충은 또 굉장히 고집불통이기도 하다. 그는 소설끝까지 자신의 기분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 즉 영호충은 기분파이면서 자기자신에(만) 굉장히 충실한 사람이다.
나는 이런 영호충의 삶이 올바르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난 이런 삶이 꽤나 마음에 든다. 도가적인 상상력이라고 해야하나..굉장히 개인주의적이지 않은가? 자기 삶에 충실하면서 세상의 영욕, 규범에는 얽매이지 않는 삶. 특히 내가 집중한 부분은 자기 삶, 기분, 현재에 대한 충실함이다. 그와 대결하는 고수들은 대부분 무림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층세대지만 더 강한 무공, 더 높은 위치를 욕망하다가 실패하고 불행해진다. 또 정사의 구분에 얽매여 좁은 시야로 사람들을 판단하다가 배신하고 배반당하는 추악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나친 욕망이 없는, 그리고 규범에 과도하게 얽매이지 않는 건전함. 그게 영호충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비전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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