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써야할 떄면 늘 그것과는 관련없는 글이 읽고 싶은 법이다. 

학부시절부터 정말 재밌고 흥미로운 글들은 항상 시험기간에 만났던 기억이 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지향점은 개개인들의 내러티브를 이론으로는 보존할 수 없고 내러티브들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 필요하다는 지점인데, 그를 위해서는 내러티브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내러티브와 이론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소설은 이론과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이 작업에 영감을 준 책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이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유럽 소설에 대한 큰 그림은 거진 다 밀란 쿤데라의 것을 본뜬 것이다. <소설의 기술>에서 내가 감명받았던 부분은 소설은 이론과는 다른 인식을 제공하는데, 그건 어떤 다른 전통으로는 보존할 수 없는 성질의 진리라는 주장이다. 이를테면 권태나 지루함, 모멸감, 혹은 철학에서 다루는 시간과 공간의 문제들, 혹은 사회이론에서 다루고 있는 현대성의 문제들에 대해서 소설만이 밝혀줄 수 있는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소설은 단지 철학이나 과학이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는 장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철학이나 과학이 다루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잘, 혹은 더 잘 다룰 수 있다. 로티가 밀란 쿤데라를 지지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인데, "Heidegger, Kundera, and Dickens"라는 논문에서 그는 하이데거가 그토록 극복하고자 했던 형이상학과 유럽(대문자 Europe)의 모순점을 내러티브(쿤데라는 이런 표현을 싫어할지도 모르겠다)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쿤데라와 로티의 주장에 따른다면, 유럽에는 철학과 과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훌륭한 전통이 남아있는 것이다. 



소설과 소설가

저자
오르한 파묵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09-14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파묵 씨, 당신은 이런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스탕달에서 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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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대학강연집인 <소설과 소설가>는 원제가 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인데 굉장한 의역이면서도, 또 달리 생각해봐도 핵심주제는 소설과 소설가의 관계라 참 번역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소설의 기술>처럼 테크닉을 알려주는 책으로 오해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건 알려드리고 싶다. 생각해보면 <내 이름은 빨강>같은 소설이나 <검은 책>등을 봐도 오르한 파묵이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은 자신이 그린 그림과 자신의 관계였다. 파묵은 실러를 인용하면서 소박성과 성찰성을 양측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독서에 있어서, 그리고 소설에 있어서 소박성과 성찰성은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 힘든 관계임은 분명하다. 소설을 읽는다는 지점은 작가의 이야기 안에 발을 담근다는 점을 의미하고, 이 세계는 비록 상징적이지만 분명히 어떤 실재에 맞닿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분명 문장들 사이에 위치하고 우리가 어느 정도 이 세계로부터 이격하지 않으면 그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하다. 따라서 이 둘의 접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데, 파묵은 구체적이지만 다소 지리하게 경험을 통해 논증하고 있어 나는 이 부분을 구성주의적인 독자의 입장에서 '구성적 실재'를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파묵씨의 실용적인 답변이 나는 마음에 들고 지지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 싶다.



 나는 여기서 소설 쓰기와 읽기가 주는 즐거움이 두 부류의 독자들에 의해 완전히 망쳐진다는 것을 덧붙입니다.

1. 전적으로 '소박한' 독자들: 이 사람들 손에 들린 책이 소설이라고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은 텍스트를 작가의 자서전 또는 경험담을 약간 고친 연대기라고 생각합니다.

2. 전적으로 '성찰적' 독자들: 이 사람들 손에 들린 책이 작가의 가장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바탕으로 했다고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을 모든 텍스트가 철저한 계산 아래 만들어진 허구라고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런 사람들을 절대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소설 읽는 즐거움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 구성적 실재가 어떻게 다시 현실과 연관을 맺게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쓸모있는 예시인 것 같다. 파묵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관계를 파고들고자 한다. 하나는 언어가 어떻게 영혼에 감각적인 인상을 가져오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이 어떻게 소설적인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느냐이다.

 첫번째 측면은 주로 소설의 창작에 관련되어 있다. 파묵에 따르면 소설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인상의 표현이다(거칠게 말하면). 그에 따르면 소설가에게는 화가와 비슷한 충동이 내재되어 있어서 그가 '본' 것을 그려내고 싶은데, 화가가 그것을 선과 색채로 한다면 소설가는 단어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경우 소설가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을 조금 더 보완하고 싶은데, 인상을 궁극적으로 시각이라고 제한하는 건 파묵이 인식철학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괴테를 회화적인 재능보다 단어에 대한 재능이 앞선다고 이야기하는 지점을 생각해보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사전적으로 제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차라리 이 지점에서는 쿤데라 식으로 작가는 형식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두번째 측면으로 파묵이 보여주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소설을 향유하고 즐기고, 무엇보다도 참여하느냐라는 문제이다. 파묵이 좋아하는 말처럼 소설은 소설가가 가지는 하나의 박물관일 수 있다. 박물관에 무엇을 모아두든 그것은 소설가의 전적인 자유에 속할 것이지만, 또 소설가는 아무래도 낮에 입장한 독자들의 입담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시점에서 박물관은 오롯이 소설가의 것만은 아니게 된다. 재밌게도 파묵은 이 지점에서 부르디외를 인용하고 있는데(아마 부르디외의 성찰성 논의를 읽었다면 더 흥미로웠을게다) 분명 어느 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성취이며 여기에는 보상이 있다. "어떤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은 작가의 의도나 독자들의 반응을 파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텍스트 속 지식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고 텍스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내는 데 있습니다." 라는 식의 기준을 충족한 독자들은 적어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너, 오르한 파묵 읽어봤어?" 이 부분에서 파묵은 쿤데라보다는 훨씬 독자친화적인데, 쿤데라라면 작가의 박물관에 대해 세르반테스를 빌어서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토마시는 나의 것"이라고. 


뭐 재미있는 책이었다. 라고 마무리하기엔 조금 짧게 쓰는 거 같은데, 사실 파묵의 강연 자체가 뭔가 결론을 주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이론적인 문제점을 강하게 빵 찔러놓고 경험적인 영역에서 이런 측면도 있고 저런 측면도 있는 거 같다.. 좀 이런 식인 거 같아서. 물론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라는 독자에게는 각별하게 느껴진다. 이런 부분은 정말 좋았다. 아니 아, 쓰고 나니까 이 부분을 넘어가면 안 될 거 같다. 


 하지만 내가 이제 자세히 설명할 박물관 같은 특성이 있는 소설들은 생각을 일깨우기보다는 간직하고 보존하며 잊히는 것에 저항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이게 내러티븐데!!!). 마치 서양에서 가족들이 일요일에 박물관에 가서 자신의 과거 가운데 일부가 잘 보존된 것을 보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처럼, 소설 독자들도 책장을 넘기다 실제 버스를 탔던 정거장, 읽었던 신문, 좋아하는 영화, 창밖으로 보았던 저녁노을, 마셨던 사이다, 보았던 포스터와 광고, 걸었던 골목과 거리와 광장─<검은 책>을 발표한 후 독자들이 소설에 나온 거리를 걷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들어갔던 상점(알라딘의 가게 같은), 입었던 옷과 마주할 때 커다란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 행복감의 한 원인은, 우리가 박물관에서 느끼는 어떤 착각과 비슷합니다. 이는 역사가 공허하고 무의미하지만은 않으며,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는 간직될 거라는 느낌과 자긍심입니다. 진정한 문학과 소설의 불멸성에 관해 널리 퍼진 공허한 믿음들도 이 자긍심과 위로를 뒷받침해 줍니다. …
 많은 소설가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바로 내가 본 것들을 보고, 느낀 것들을 느꼈군요. 마치 내 인생을 쓴 것 같아요." 이 호의적인 말에 기뻐해야 할지 속상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무에서 상상력만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창조적인 소설가가 아
니라, 어떤 공동체에서 모두 함께 공유하는 어떤 삶을 기록하는 역사가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하이데거와 쿤데라, 그리고 디킨즈에 대한 로티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상상으로 시작된다. 만약 서양이 버섯구름과 함께 멸망하고 100년이 지난 뒤에 인도와 한국의 독자들은 Europe을 어떻게 기억할까? 로티는 철학적인 결론으로 소설을 이야기하는데, 어떤가. 이게 좀 설득력이 있나. 


대수롭지 않은 포스팅, 그러나 오랜만의 포스팅을 해야겠다. 

단문들이지만, 사실 단문 정도면 내 시시한 일상에는 충분한 의미부여가 가능하리라. 

우선, 아주 오랜만에 중앙도서관을 갔다.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다, 갈증을 채웠다. 

되게 쑥스러운 일인데, 난 울학교에 안나 "카레리나"를 검색해보고 아, 어떻게 학교 도서관에 안나 카레리나도 없을까 개탄스러워하며 안나 카레니나를 신청한 적이 있다. 

물론 여러분은 안나 카레리나가 아닌 카레니나만 쳐도 수두룩하게 나오는 목록들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여튼 그리하여 최신 번역판을 내가 신청한 바 있는데, 정작 그 신청한 책을 내가 빌리진 못 했고 방학이 된 지금 안나 카레니나 1권을 빌리기는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문과 학생 누구든 방학이 되면 뭔가 고전이든 소설이든, 아니면 고전소설이든 자기가 읽지 못 했던 어떤 책이 읽고 싶은 게 당연하니까.

그러나 안산 중앙도서관에 가면 그런 걱정은 덜어도 된다.


내가 아주 단순하게 잡은 안나 카레니나의 골조는 레빈과 키티의 순결한 사랑, 그리고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같은 사랑이라는 두 축이 교차되는 십자가이다.

무엇보다도 굉장히 신선하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역에서 만나는 장면이었다. 

하필이면 왜 역이었을까. 안나의 "예감"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촌스럽지 않고 너무나도 근사하고, 두근거렸다. 

안나가 브론스키를 보고 "하필이면"이라고 생각했던 것, 브론스키가 안나를 따라갔던 것, 그리고 그 이후의 전개들 모두다 단지 개연성있고 낭만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바로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해보자.

우선 내게 안나 카레니나를 소개해준 사람은 밀란 쿤데라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에서 소설적인 '인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철학이나 사회학이 아닌 오직 소설만이 밝혀줄 수 있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밝힌다'라는 말을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사용하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앎은 불, 혹은 빛으로 표현된다. 안나 카레니나와 레빈의 '빛'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을 보도록 하자.


(안나 카레니나가 기차에 올라타 소설을 읽는 장면 추가할 것)

그것은 가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기에게 삶과 인간관계의 의미를 드러내준 그 날카로운 빛 속에서 그 점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
'불가능해! 삶이 우리를 가르는 거야. 나는 그를 불행하게 만들고, 그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야. 그 사람이나 나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해.... "
… 그녀는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을 혐오스럽게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선명함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았으며, 그 선명함은 그녀를 기쁘게 했다. 
… '그래, 내가 어디에서 멈췄지? 인생이 고통이 아닐 수도 있는 상황을 생각할 수 없고, 우리 모두 고통을 겪기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을 기만하기 위한 수단을 고안하고 있다는 것에서 멈췄지. 하지만 진실을 안다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자기가 브론스키와 처음 만나던 날 기차에 치어 죽은 사람을 상기하고 지금 무어을 해야 할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급수탑에서 레일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빠르고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가 자기 옆을 지나가는 기차에 바짝 다가가 멈춰 섰다. 그녀는 객차의 아랫 부분, 나사와 연결부 그리고 천천히 구르고 있는 첫 번째 객차의 커다란 쇠바퀴를 보며 눈어림으로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의 중간 지점과 그 중간 지점이 자기 앞에 오는 순간을 재보려고 노력했다. 
'저기로!' 하고 그녀는 객차의 그림자와 침목 위에 흩뿌려진 석탄과 뒤섞인 모래를 응시하면서 중얼거렸다. '저기로, 바로 저 한가운데로, 그렇게 나는 그를 벌하고 모든 사람과 나로부터 벗어나는 거야.' 
 그녀는 한가운데가 자기와 나란히 된 첫째 차량으로 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손에서 내려놓으려 한 빨간 여행 가방이 그녀를 방해하여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중간 부분이 그녀를 지나갔다. 그래서 다음 차량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녀는 수영하려고 물속에 준비할 때 느꼈던 것과 유사한 감정에 사로잡혀 성호를 그었다. 성호를 긋는 익숙한 동작이 그녀의 마음속에 어린 시절과 처녀 시절의 갖가지 기억들을 불러냈고, 갑자기 그녀의 모든 것을 덮고 있던 어둠이 찢어졌다. 그리고 일순간 그때까지의 삶이 온갖 밝은 과거의 기쁨에 감싸여 그녀 눈앞에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가오는 두 번째 차량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바퀴와 바퀴 사이 한가운데가 그녀 앞에 이른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빨간 여행가방을 내던지고 머리를 어깨 사이로 움츠리고 양손을 짚고 차량 밑에 쓰러졌다. 그리고 가벼운 동작으로 마치 이내 일어날 준비를 하듯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기가 한 일에 전율했다. '내가 어디 있는 거야?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도대체 왜?' 그녀는 일어나 몸을 젖히고 싶었다. 그러나 무언가 거대한 것이 가차 없이 그녀의 머리를 치고 등을 끌고 갔다. '신이시여. 저의 모든 것을 용서해주세요!' 그녀는 저항이 불가능함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노인이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며 철로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불안, 기만, 괴로움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던 한 자루의 촛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밝게 타올라, 그녀에게 지금까지 어둠 속에 놓여 있던 모든 것을 비춰주다가 바지직거리며 어두워지더니 영원히 꺼져버렸다. 


톨스토이가 불안, 기만, 괴로움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이라 말한 것은 안나가 기차에서 소설을 읽는 장면과 쌍을 이룬다. 안나는 자신의 삶이라는 소설을 읽고 그 주인공을 되고 우리는 안나의 연구를 지켜본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는 레빈의 탐구 역시도 나타난다. 톨스토이가 명시하는 것처럼 레빈은 형의 죽음과 아들의 탄생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콘스탄틴 드미트리치, 미튜하(농부는 가옥 관리인을 경멸적으로 그렇게 불렀다)가 어떻게 이득을 안 볼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어떻게든 쥐어짜서 자기 몫을 챙기니까요. 그는 기독교 신자를 봐주지 않을 거예요. 포카니치 아저씨(그는 플라톤 노인을 그렇게 불렀다)는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짓은 하지 않아요. 그는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빚을 탕감해주기도 하지요. 그는 아무도 착취하지 않아요. 똑같은 사람이니까요." 
"그럼 무엇 때문에 그는 빚을 탕감해주지?"
"그거야, 사람도 여러 종류니까요. 미튜하처럼 자기 필요만을 위해 살고 자기 이속만 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포카니치처럼 정직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는 영혼을 위해 삽니다. 신의 뜻을 이해하는 거지요." 
"어떻게 신을 이해하지? 영혼을 위해 사는 게 어떤 거야?" 레빈은 거의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라니요? 뻔하지요, 신의 따라서죠 하지만 사람들은 가지가지입니다. 당신을 보면, 남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으시잖아요." 
"그래, 그렇지, 잘 가게!" 레빈은 흥분한 나머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자마자 지팡이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쁨이 레빈을 휩싸고 있었다. 포카니치가 신의 뜻에 따라 영혼을 위해 산다는 농민의 말을 듣자, 불분명하지만 의미심장한 생각이 지금까지 어딘가 닫혀 있던 데서 떼를 지어 뛰쳐나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그 자체의 빛으로 그를 눈멀게 하면서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감정은 내가 꿈꾸었던 것처럼 갑자기 나를 변화시키지도, 행복하게 해주지도, 밝게 비춰준 것도 아니다. 마치 아들에 대한 감정과도 같다. 또한 그 어떤 뜻밖의 선물도 아니다. 이것이 신앙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감정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내 영혼에 고통과 함께 들어와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반에게 화를 낼 것이고, 논쟁도 벌일 것이며, 마땅치 않은 때 내 의견을 표현할 것이다. 여전히 나의 가장 성스러운 영혼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심지어 내 아내와의 사에에도 벽이 존재할 것이며, 내가 느끼는 공포를 가지고 아내를 비난하고 그 때문에 후회를 할 것이다. 나는 또 여전히 왜 내가 기도하는지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해도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의 삶은, 나의 삶 전체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에 구애받음이 없이 매 순간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내 삶 속에 부여할 수 있는 선의 의의를 지니게 될 것이다!' 


 나는 이들의 탐구를 단순히 톨스토이의 탐구로 등치시키고 싶지는 않다. 물론 이 소설을 쓴 사람은 톨스토이다. 하지만 안나와 레빈 모두 충분히 살아숨쉬고 있지 않은가.. 너무 단정짓는 것같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밀란 쿤데라가 이야기하는 소설의 인식을 빛의 형이상학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궁극적으로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의 인생에서 아직 빛을 비추지 못했던 어두운 부분의 것이다. 그러나 빛은 찰나적이고 안나와 레빈은 그것에 대한 인상을 이해하고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그들은 행동한다. 안나는 온통 악과 가식으로 가득찬 세계를 발견했으며 그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쳤고, 레빈은 삶의 의미를 종교적인 사유와 휴머니스틱한 행위로 형성시켜나가고자 한다. 

한편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인식의 측면에서 대조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다못해 지식인인 세르게이조차도 그가 볼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 브론스키는 말할 것 없고, 오블론스키는 그 가능성을 탐구하지 않는다.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소설 내에선 비성찰적인 군상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자우림 4집을 듣는다. 곤궁했지만 더 곤궁했던 고딩시절에 샀던 몇 안 되는 CD앨범. 

독서실에서 매번 돌리고 또 돌렸던 것 같다. 이 앨범이 나올 때가 2002년이었는데 수능 전까지 열심히 독서실에 가다가 시험이 끝나고 자리에 둔 이 앨범을 찾으러 가니까 이미 누가 가져가고 없더라. 그 다음에는 자우림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대로 접한 자우림 앨범이 되겠다.

고등학교 때 자우림을 좋아하던 친구들의 영향으로 난 자우림의 음악에 대해서 약간의 오해를 품고 있었다. 우리 동네가 촌동네여서 그런지는 조금 튀어보이고 싶어했던 애들은 김윤아를 일종의 위악으로 받아들였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김윤아의 튀는 행보가 그저 그런 위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 초반 시절과 군대에 가기 직전까지 줄기차게 들었던 건 김윤아의 음악이었다. 오해를 풀게 된 게 바로 쓸만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가득차 있는 이 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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