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이명박이라는 이름 석 자를 쓸 때 몹시나 두렵다. 이러다 코렁탕 한 사발 하는 게 아닐까... 마찬가지로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쓸 때도 엄청 두렵다. 노무현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는 게 어떤 사람들에겐 일종의 신성모독적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두 가카에 대해 글을 쓸 때의 두려움은 그들이 획득한 권위로부터 나오는 권리겠지만, 나에게도 마음껏 할 말을 할 권리는 있는 거니까, 뭐 퉁칩시다. 사실 본격적으로 글을 쓸 건 아니고, 항상 난 별 볼 일 없는 글 쓰면서 서설만 길더군.

 

우선 한국 정치에 있어서 두 개의 이성을 상정하도록 하자. 하나는 엘리트적인 집단 이성. 이 이성은 지식인들, 자본가들, 정치인들, 그리고 언론인들이 그 지분을 보태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중적 이성. 이 이성은 엘리트적인 이성보다는 더 광범위하지만 희미한 경계를 갖고 있으며 엘리트 이성보다 공적인 영역에서 드러나는 일이 드물다. 비록 민주주의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국가와 정치, 경제의 공적 영역이 엘리트 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전부는 아니지만 공적 영역은 엘리트적 이성이, 그리고 좀 더 내려와서 일상적인 영역은 대중적 이성이 지배적이라고 일단 나는 가정해본다.

우선 조금 애매한 대중적 이성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마페졸리는 수없이 변화하는 지배자들과 달리 지속적으로 존재한 대중들의 '지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8,90년대 학자들이 말하는 민중이 어떻게 보면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대중적 이성을 주로 그것이 엘리트적 이성에 의해 열광하고 도취된 상태에 놓였을 경우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파시즘이나 포퓰리즘, 문화혁명들을 그 사례로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본디 대중적 이성은 시니컬한 경우가 보통이다. 일상에서 행해지는 저열한 정치토론들, 온갖 소문들은 잘 드러나진 않지만 엘리트적 이성의 목소리보다 훨씬 가까이 그리고 자주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일상적인 지혜는 잘 알고 있다. 이 선거가 지나면 이놈도 결국 저놈이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 공약은 空約이 될 것이라고 아주 뚜렷하게 알고 있다. 대중적 이성은 항상 의뭉스럽고 그 속을 짐작하기 어렵다. 대중적 지혜는 엘리트적 이성에 의해 어떤 경우에는 하늘의 뜻이라고 칭송받고 어떤 경우에는 포퓰리즘이라고 욕을 먹는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엘리트적 이성은 짧고 자주 변하는데 비해 대중적 이성은 잘 보이지 않지만 길게 지속된다. 대중적 이성은 국가에 얽매여 있지 않으며 오히려 문화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노무현의 정치는, 이런 말 하면 몹시나 싫어할 사람이 많지만, 전형적인 엘리트의 정치였다. 여기에서 나는 엘리트적 이성에 대해 비판을 가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 오히려 나는 노무현이 처한 현실에서 그가 보여준 용기에 대해선 존경을 아끼지 않는다. 그것은 실패했지만 분명히 의미있는 시도였다. 중요한 점은 그의 시도는 한국의 정치 현실을 고치고 개선하려는 엘리트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가 보기엔 한국의 정치풍토는 비합리적이었고 다른 엘리트들이 만들어낸 구조는 이제는 부수고 새롭게 만들어야할 것들이었다. 그런 시각과 의도를 갖출 수 있었다는 건 노무현이 대중적 이성보다는 엘리트적 이성에 더 가깝다는 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한 가지, 노무현을 기존의 엘리트적 이성과 구분짓는 것은 그가 대중적 이성을 어느 정도 읽었고 그것에 따르는 정치를 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노무현은 한국 엘리트들이 만들어낸 정치질서의 성격을 대중적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보수적인 엘리트들과 싸웠는데 이를 위해 다른 엘리트들과 무엇보다도 대중에게 의존했다. 물론 그가 의존했다고 해서 정말 대중이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친 건 아니지만-그것은 어차피 한국의 정치구조상 불가능하다-, 어쨌든 그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장 이질적인-혹은 새로운정치를 편 셈이 되었다. 당연히 엘리트 집단 내부에서 그는 위험해보였을 것이고 또한 대중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 가장 강력하게 가해진 것도 노무현 집권기였다. 이는 뉴라이트의 발흥과 포퓰리즘에 대한 논의가 노무현대에 활발해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쨌든 오늘 교수님 말을 빌리자면 노무현은 '새 시대의 맏형'이 되고자 했는데 그는 잘 몰랐겠지만 실은 '구 시대의 막내'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를 나는 아방가르드라고 표현한다. 낡은 양식에서 스스로를 붕괴시키면서 새로운 양식을 예견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의 역할이고 노무현은 언급하겠지만 대중적 이성에 의한 정치, 이명박 시대를 예견한 셈이 되었다.

 

이명박은 엘리트보단 대중에 가깝다. 그의 인생역정과 그의 사고, 언행, 그리고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그의 치적은 그가 왕보다는 일개 범부에 가까운 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잘 생각해보면, 정치인으로서의 그는 프로보다는 아마츄어에 가깝다. 마치 지역 사업인들이 지역의 의원직, 혹은 행정수반을 차지하듯이 이명박은 한국 국가의 행정수반을 아마츄어로서 차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명박의 인생을 성공스토리로, 대중에 가까운 인물로 생각한 투표자들은 틀린 판단은 하지 않은 셈이다. 그들이 오산한 것은 대중이 대중을 가장 위해주겠거니, 하는 마음이다. 이명박은 대중적 이성을 지닌 일원으로서, 전대의 엘리트들이 맹비난한 포퓰리즘의 아비투스를 노무현보다도 더 깊숙히 체화하고 있는 사람이다. 엘리트 집단에서는 한물간 것으로 여겨지는 개발주의와 지역주의, 그리고 연줄에 집착하는 비합리적인 측면은 그가 아주 평범한 한국아저씨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훌륭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인 것이다! 당연히 그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한국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역할과 평범하거나 오히려 못난 그의 자질 사이의 간극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평범함이 사실은 우리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친숙한 모습이라는 점이다. 그게 싫으면 애초에 훌륭한 사람을 뽑든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정동영이라는 전형적인 엘리트가 대중에게 주었던 혐오감은 그가 가지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장점에 대해 단 일초도 고려하지 않게끔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그보다 훨씬 못 한, 그러나 평범하고 친숙한 우리 이명박 대통령 각하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헌납하고 만 것이다.

 

내가 고려하는 것은 이제는 한국의 대통령이 정말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인식을 우리 이명박 대통령이 철저하게 부숴버렸다는 점이다. 물론 앞으로도 쭉 이런 평범한 사람만이 대통령에 오르진 않을 것이다. 대선후보가 될 지도 모르는 안철수나 다른 한나라당 정치인들은 전혀 달라보이지만 엘리트라고 같이 부를 수 있는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명박이 정권을 내놓고 난 뒤 정말 철저하게 숙청당한다면 그것은 그의 정치의 엘리트적 기반이 약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이명박의 정치에 대한 비난은 차치하고 그것이 새로운 시대에 등장할 정치의 맏형 노릇을 했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다. 그의 정치는 매우 대중적이고 저렴하다. 마치 옆집 아저씨가 대통령이 된다면, 아니면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하고 싶은 일들을 그는 했다. 그의 정치는 대중적 이성에 기반하고 있어서, 그는 모든 대의가 사실은 일정한 종류의 욕망을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모든 기업이 잘 되는 나라보다는 이왕이면 내가 아는 사람의 기업이 잘 되는 나라, 모두가 잘 되는 정치보다는 이왕이면 나랑 친하고 (나한테는) 착한 사람들이 떵떵거릴 수 있는 나라가 당연히 보통 사람한테는 좋은 것이다. 아니, 나라도 내 대통령되면 아는 사람들한테 떡고물 좀 돌리지. 그걸 쉬쉬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명박 정치의 비엘리트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엘리트들은 항상 정당화를 중요시하고 또 스스로 무언가 믿을 목표가 필요한 존재니까. 평범한 이명박은, 대중적 이성은 그런 것보다는 결국 목숨이, 일신이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안다.

 

따라서 나는 노무현의 정치를 엘리트 정치에서 일탈하려던 일종의 아방가르드 정치로, 이명박의 정치를 기존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정치로 이름붙인다단선적인 방향에서의 평가들과는 달리 어떻게 보면 우리가 퇴보라고 부르는 일들이 아주 과격한 변화의 흔적일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명박의 정치가 멀리는 노태우의 대선구호였던 '보통사람'의 정치를 진짜 실현하고 가까이는 정치의 엘리트적인 덕성을 파괴시킨 것처럼, 앞으로 정치의 어떤 '일상화'가 진행되게 될 런지, 잘 지켜보자.

 


학문, 좀 더 좁게 접근하자면 현대의 학문체계에서 비조들은 짠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스승은 있었다. 어떠한 대가라도 누군가에게는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공부하여 자신의 것으로 습득하는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지식이 애초에 외재하기 때문에 지식을 습득하는 관계는 애초에 의존적일 수 밖에 없다. 지식을 습득하는 가장 자의적인 방식인 깨달음조차도 그렇다. 예수가 기독교의 진리를 갈파하는데는 유대교, 특히 에세네파의 제기가 필요했고 그것을 표현하는데는 그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지만 유대교의 표현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부처는 육도학파의 도전이 필요했고 맑스는 헤겔과 고전경제학이 필요했다. 한 학문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원을 짬뽕한 곳에서 +a가 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비조에 대한 경외는 그의 업적을 최대한 쓸모있게 이용하는 데 있다. 숭배하는 자세보다 최대한 영악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소화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스스로의 제일 윗 스승에게 보은하는 길이다. 맑시즘을 예로 들자면 공산주의의 관변학자들은 결국 숭배의 늪에 빠졌지만 맑시즘의 혁신은 신자유주의 유럽에서 나왔던 것이다.

사회과학에서 하나의 전통은 유일의 전통이 되고자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게임의 법칙을 제시하고 그 게임이 어디까지 적용되는가 무한한 실험을 통해 그 정당성을 확립하고 참여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더 많은 구성원들이 패러다임에 합류하게 만든다. 하지만 저변을 넓히기 위해서는 그 패러다임이 어느 순간 뚝딱 만들어진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고 마치 자연법칙처럼 어느 시대에도 진리였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과거의 비조들은 다시 그 전통의 비조로 부활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또는 반대로 이제 사라진 전통의 비조들은 지나간 유행이라는 단어로 학문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고전을 공부한다면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도 학문공동체 안에서 큰 효용을 얻게 되는데 이를 알아보자. 처음으로 생각해볼 경우는 학습자가 주류 패러다임에 속해 있거나 이에 좀 더 다가가는, 혹은 패러다임의 핵심이나 상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경우이다. 고전은 패러다임이 도달하고자 하는 위치를 보다 단순한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패러다임의 목표에 보다 친숙한 '태도'를 갖추게 해준다. 또한 패러다임 내에서 고전은 하나의 이상향이기 때문에 고전에 친숙한 그는 낙원에 가까운 이라는 권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한 목표를 둔 학문공동체 안에서 목표가 또렷한 자는 '착한' 이일 수 밖에 없다.

반대로 패러다임을 반하고 그것의 이상사례를 검증하려는 이라면 고전의 이단적인 부분을 공부함으로써 정론을 논박할 수 있다. 패러다임과 사상가의 수적인, 시간적인 불일치는 필연적으로 둘의 관계가 동일한 범주를 가질 수 없게 만든다. 고전은 현재의 패러다임에서 이단적인 부분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불일치가 가져오는 긴장을 통해 패러다임의 약한 부분을 논박할 수 있고 또한 그 시도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학습자가 패러다임을 반하는 경우에도 고전은 그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학문이 구성되었다는 입장을 따르면 고전은 따르는 자, 반하는 자, 그 모두에게 좋은 무기가 된다. 나는 그래서 잘 배우기 위해서 고전을 읽고, 반항하기 위해 고전을 읽는다.


이런 질문을 제기해보자.
음악지식을 알면 알수록 음악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까?
가령 악보를 볼 줄 아는 사람, 곡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보다 더 그 곡에 대한 상위의 해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일반대중이 상대적으로 음악에 대한 전문가인 연주가와 지휘자들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들의 음악에 대한 평을 내릴 수 있을까?

최근 나의 흥미를 돋군 논쟁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클래식 음악 사이트 고클래식(http://www.goclassic.co.kr/)에서는 음악적인 지식과 음악적인 이해, 인식, 그리고 음악 자체에 대해 꽤 심도깊은 논쟁이 이루어졌다. 나의 지적관심사와도 맞닿는 부분이 있어서 꽤 재미있게 그 논쟁을 지켜봤다. 간단하게 그 논쟁의 경과와 대립되는 각측의 의견들을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이 논쟁을 소개하고자 한다.

논쟁의 발단은 교향/관현악 게시판의 6283번글, Dvorak(이하 D)님의 " 데이비드 진만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구해서 들어봤습니다만.."이라는 글로부터 시작되었다. (http://blog.goclassic.co.kr/dvorak/tb/1285143374) 이 글에서 D는 데이비드 진만의 연주를 밋밋하며 마치 맹물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사실 이 글 자체로 보면 논란의 여지는 없었고 그 게시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감상 수준의 게시글이었다. 하지만 이 글에 hajin(이하 H)님의 댓글 "음악을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하여..."이 게시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http://blog.goclassic.co.kr/hajin/tb/1285181631) 이 글에서 H는 음악감상의 더 높은 단계에 이르기 위해선 항상 배움의 자세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감상자는 음악을 해석하고 그것을 접하게 만들어주는 연주자와 지휘자의 권위를 인정해야하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그들이 음악을 훨씬 많이 접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합리적'이기 때문이다.("......그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 때문에 올바른 비평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며 (권위로부터 습득된 음악적) 지식에 기반한 것이어야한다고 H는 주장하고 있다.

H님의 주장은 감상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충고로서 나쁘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것이 게시된 시점이 다분히 D님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도가 의심받았다. 또한 음악지식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좋았지만 그것을 습득하는 방법, 그리고 음악가집단의 권위에 대한 정당화에 있어선 실패했다. 그리고 청자집단에 대한 정의가 모호했기 때문에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글에서 프로의 윤리를 강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음악이란 것이 단순히 귀의 즐거움을 만족시켜주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지적인 기반을 둔 목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추후 전개될 논쟁에 중요한 주제를 제공해주었다. 음악은 단순히 감각적인 행위만은 아닌 것이다.

클래식음악에 대한 아주 평범한 의견은 그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가사가 없는 순수기악의 경우에는 적어도 작곡가가 제시한 악상들을 파악하고 그것을 종합하면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익숙한 의사전달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클래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연히 그 과정을 어렵게 느낄 수 밖에 없다. 이 논쟁이 진행된 커뮤니티는 클래식음악에 대한 고수와 초보들이 다양하게 분포해 있는데 암묵적으로 그들은 '어려움'에 대한 동의를 갖고 있다. H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한 댓글은 그가 제시한 방법 중 한가지, 악보를 읽을 수 있게되면 음악에 대한 이해가 증진된다는 점을 공간감을 시각화한다는 설로 지지하고 있다. 이 논쟁에서는 대체로 음악지식에 대한 추구 자체가 곡에 대한 이해를 수월하게 한다는 점에 대해선 동의하고 있다. 일단 도움은 되는 것이다.

논쟁은 이어서 음악토론 게시판의 1148번글, souly(이하 S)님의 "악보는 우리를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해줄까? "(http://blog.goclassic.co.kr/hajin/tb/1285181631) 글에서 보다 정돈된 주제로 진행되었다. S는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음악지식은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S에 따르면 '악보'는 음악가에서 그것을 연주하는 집단에 제시하는 기호로서 존재하는데 결국 청취자가 듣는 음악은 음의 형태를 띄기 때문에 음악감상에 악보를 곁들이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S는 피터 키비가 제공한 사례를 보여주는데 이 사례는 청자들은 각기 다른 형태로 음악을 인식하지만 궁극적인 미적 경험은 같음을 보여준다. 결국 음악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상대적이라는 점과 그것을 수직적인 위계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S는 악보, 그리고 여러 이론과 지식을 통해 음악에 대해 보다 폭넓은 이해는 가능하겠지만 그것을 보다 깊은 이해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논증하고 있다.

S의 의견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것은 fishtail(이하 F)의 "souly님 생각의 몇 가지 오류."(http://blog.goclassic.co.kr/fishtail/tb/1285770203) 글이다. souly의 의견에서는 음악의 인식과 미적 체험이라는 용어가 다소 혼동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점,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고 감동하든 음악감상은 분명 음악가가 하나의 곡을 통해 제시한 본질에 다가가는 과정이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souly의 논법은 음악에 대한 이해가 넓은 차원의 것이라는 것을 논증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어떤 목적을 가진다는 점, 그 목적아래 넓은 차원의 위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을 F는 짚어낸다. F에 따르면 음악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수동적으로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재해석을 가하는데 여기에서 음악지식이 작용할 원리가 존재한다. 또한 souly는 미적 체험을 단순히 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대충 이런 큰 틀 아래서 여러가지 의견이 펼쳐졌고 이 안에서 음악에 대한 인식과 음악활동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이 제기되기까지 했다. 비록 학술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 논쟁은 아니었고 결론을 얻기엔 논의가 부족했다는 점은 있지만 정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루어진 논쟁으로선 꽤 훌륭한 수준이었다. 커뮤니티 자체의 분위기는 논쟁의 격화를 줄이고 그것을 실용적으로 해석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클래식 동호회원으로서 필요하고 건전한 논의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에게 하나의 감상법과 비평법을 강요할 순 없지만 적어도 한 개인은 스스로의 방법론에 대해 심의하고 그것을 습득할 필요성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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