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나라도 이렇게 표지만들면 안 될까.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 대해서 리뷰하도록 하자! 


불멸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중에서도 제법 길고 두꺼운 책이다. <농담>이나 <이별의 왈츠>처럼 경쾌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좀 더 무거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과 망각의 책>과 상당히 비슷한 외양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분량이 길다기보다는 여러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있고, 그 이야기들이 중첩되어서 보여주는 색깔이 복잡미묘하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은 쿤데라의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꽤나 어려운 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불멸>이 뭐에 대한 이야기다, 딱딱 이야기할 수 있는 자신은 없다. 그러므로 천천히 여러 이야기들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선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갈등구조인 아녜스-로라의 대칭쌍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소설에서 두 자매는 끊임없이 쫓고 쫓기는 경주를 펼치고 있다. 아녜스는 우스꽝스러운 불멸에 대해서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의 다른 책제목인 <배신당한 유언들>처럼 어떤 개인의 유산은 그가 지상을 떠나는 순간 더이상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혹은 그녀의 유산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 그것이 산 사람의 죽은 이에 대한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아녜스는 그녀의 몸짓을 로라에게 빼앗겼을 때의 불쾌감은 자아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당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자신과 로라의 운명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현대성의 병폐는 자아에 대한 타자의 무자비한 침범과 또 그것이 정당화된다는 점에 있다. K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조차도 타자들은 성실하게 관찰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가. 그래서 아녜스의 아버지는 죽은 아내의 사진을 불태우고, 집을 떠나서 혼자 살기를 원하고, 임종이 다가와서는 아녜스를 그만 보기를 원했다. 아녜스와 그녀의 아버지는 오롯이 기억되기를 원한다. 그 기억은 그 유산을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자들에게만 허용되어야 했다. 그런 이들에게 원하지 않는 불멸, 불멸이라는 소송은 원치 않는 존재의 징벌이다. 



역사와 현실 속에서 항상 이기는 쪽은 미래다. 불멸이란 법정에서 정의는 항상 미래에 있다. 정의란 미래에 속해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해도 될까. 『소설의 기술』에 나오는 것처럼 미래는 과거에 대해 당당하게 권력을 행사한다. 아녜스는 끊임없이 로라를 따돌리고자 노력했지만 끝내는 자신이 따라잡히리라는 사실을 안다. 괴테 역시도 '이 귀찮은 쇠파리(diese leidige Bremse)' 베티나가 끝내는 자신의 유언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괴테와 베티나는 이 소설의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대립쌍이다. 영민한 베티나는 불멸을 향해 걸어가는 괴테의 모습을 보았고 내 생각으로는 그 불멸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베티나는 괴테에게 어린아이로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무릎에 앉는 베티나에게 괴테는 매혹되었지만 곧 괴테는 베티나의 관심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베티나가 그에게 편지로 전한 말 "나에겐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리라는 굳고 견고한 의지가 있답니다."라는 문구에서 베티나의 관건은 '영원히'와 '의지'였던 것이다. 베티나는 괴테에 대한 책을 쓰기를 원했고, 괴테의 편지를 출간하기를 원했고, 괴테의 연인으로 기억되고 싶어했다. 그녀에게 괴테의 다른 부분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세계의 다른 여러 부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베티나와 로라는 그래서 무언가를 얻어낼 때의 몸짓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금 당신들이 하는 말에 난 흥미 없어요. 난 회계사가 아녜요. 나란, 바로 이런 인간이에요!" 라고 대답하며 그녀는 손가락 끝을 가슴에, 정확히 두 젖가슴 사이에 얹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가볍게 뒤로 젖히고 얼굴을 미소로 가린 채 두 팔을 갑작스럽게, 그러면서도 우아하게 앞으로 던졌다. 동작 초기에는 손마디들이 모두 붙은 상태였으나, 마지막 순간에 두 팔이 떨어지면서 두 손바닥도 활짝 펼쳐졌다. 

 그렇다. 여러분의 기억은 정확하다. 앞 장에서 '뭔가' 하고 싶다고 말할 때 로라가 바로 그런 몸짓을 했다. 그 사황을 돌이켜 보자. …

 베티나와 로라의 그 몸짓을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 명명하자. 큰 불멸을 갈망하는 베티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길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작은 불멸을 희망할 뿐이지만, 로라 역시 같은 것을 원한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자신이 겪는 불행한 순간을 초극하여, 자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베티나와 로라의 불멸 속에서 괴테와 아녜스는 불멸하는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남을 것이다. 베티나는 괴테를 찬미했지만 또한 귀족 앞에서의 모자사건처럼 괴테를 우스꽝스러운 불멸로도 기억하게 만들었다. 불멸의 소송의 당사자가 된 괴테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괴테가 불멸이라는 법정에 대해 두려움에 떠는 헤밍웨이에게 이야기하는 구절은 <I'm not there>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쿤데라가 괴테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것은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미지 안에 보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괴테는 죽고 오직 그의 책들만이, 그의 유산만이 남을 뿐이다. 물론 괴테는 모두가 그 뒤에 남을 이미지에 대해서 신경쓴다는 인간적인 실수는 인정한다. 쿤데라가 그리는 괴테 역시도 그런 실수로부터 벗어날 순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소송이 괴테 그 자신에게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괴테는 노발리스가 이야기하는 완전한 비존재의 '관능'으로 잠들기를, 그래서 바보같은 불멸의 소송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죽음, 불멸없는 죽음은 쿤데라에게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것의 반대는 관념적인 죽음, 시인이 꿈꾸는 위대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뒤로 남긴다는 사실에 아녜스는 질색하고 로라는 매달린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 아녜스는 폴이 그녀에게 다가오기 전에 더 빨리 죽기를 소망한다. 반대로 로라는 연인의 별장에서 죽기로, 자신의 육체를 연인에게 온전히 바치고 가기를 소망한다. 카프카는 자신의 모든 글을 불태우라고 유언하고 미테랑은 홀로(그러나 역사와 함께) 팡테온을 순례한다. 내 생각으로는 밀란 쿤데라가 옹호하는 지점은 철저하게 전자이다. <호모 센티멘탈리스>에서 쿤데라가 비판하는 지점은 기독교 유럽은 '사랑'을 통해 자아의 소유권을 효과적으로 침해하는 방식을 발전시켜왔다는 것이다. 개인의 사랑과 감정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이해되고 준수되어야할 것들을 어기는 유죄를 너무나 쉽게 무죄로 만든다.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숭고한 감정에 고양된 사람들은 원을 그리고 날아오른다. 쿤데라가 고발하는 전체주의의 방식은 이렇게 원을 그리고 날아오르며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가리시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라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베티나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것인 무언가를 뺏고 소유하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이런저런 이름으로 타인을 재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편하게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은 사랑의 이름으로 벌어지곤 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사랑, 민중에 대한 사랑, 질서에 대한 사랑 등등…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쉽게 재단하는 것이 부정의하다는 지점을 지적한다. 왜 프롤레타리아와 애국자들을 사랑하고 예술에 정통한 베티나야말로 괴테의 사랑에 어울리고 실제로는 자신이 프롤레타리아였고 누구보다도 괴테에게 충실했던(특히 육체적으로) 크리스티아네는 역사에서 이름을 남기지 못할까. 그것이야말로 폭력이며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을 (강변하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은 물론 아니다) 『불멸』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읽으니 소설을 팸플릿 읽듯 읽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불멸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1-11-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쿤데라 전집 07 불멸소설 속의 소설이요 가장 슬프고 에로틱한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농담은 세상에 알려진 밀란 쿤데라의 첫번째 장편소설이다.

소설이 발표된 시기를 살펴보면 1967년에 쓰여져서 1967년에 발표되었으니까,

프라하의 봄 직전에 이 소설은 발표되었고, 이어 소련의 침공이 있었으니 쿤데라가 체코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최초이자 마지막 시기였으리라.

살펴보겠지만, 후에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관통하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농담>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꼽히지만, 만약 누군가에게 쿤데라를 읽혀야한다면

처음으로 읽어야할 건 <농담>이 아닐까도 싶다. 내용도 <농담>이 조금 더 쉬운 편이기도 하고.


소설은 네 명의 화자의 입을 빌려서 진행된다.(번역된 인명은 민음사의 2011년판을 따른다) 여기에서는 일단 가장 잘 드러나는 루드비크의 테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자.

우선 루드비크(Ludvik). 루드비크는 첫번째 몰락 이전의 자신을 활기차게 학생 모임에 참가하면서, 친구들과는 짓궂게 놀고, 매사 진지한 애인에게는 냉소적이며 궤변을 늘어놓지만, 돌아서면 중학생처럼 그녀를 생각하는,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루드비크의 모든 몰락이, 그리고 이 소설이 단 하나의 농담으로 시작된다. 공산당 MT, 아니 공산당 연수를 떠난 애인에게 루드비크는 엽서를 한 장 보낸다.



잘 생각해 보면 나도 실은 마르케타가 주장했던 것 하나하나마다 모두 같은 의견이었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서유럽의 혁명을 믿었다. 내가 동의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 나는 그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데 그녀는

만족스럽고 행복해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엽서를 한 장 사서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충겨을 주고, 혼란에 빠지게 하려고) 이렇게 썼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 



 약간은 신성모독인(왜냐하면 스탈린주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성스러운 시구에 악마인 트로츠키의 이름을 얹어둔 거니까) 농담에 대해서 돌아온 것은 숙청이었다. 



그들은 내게 내 우편 엽서를 읽어 주었다. ... 정치 사무국의 그 조그만 바에서 발설되자 이 문장들은 너무도 기막히게

울려서 당장 두려움이 엄습해 왔고, 내가 저항할 수 없을 어떤 파괴적 힘이 느껴졌다. 동지들, 그건 다만 장난을 치려고

했던 것 뿐이야.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믿지 않음을 느꼈다. 너희들은 이게 우스워? 하나가 나머지

둘에게 말했다.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구원의 열정으로 가득차 있던 애인에 의해 그는 밀고아닌 밀고를 당하고 당적을 파이고 군대로 내쫓김을 당한다. 그가 기대고 있던 동향 친구 제마네크(Zemanek)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충분히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 애인을 낚아채려는 속셈으로, 그를 배신하고 선고를 내린다. 이런 이중의 배신 속에서 그는 오스트라바 근교에 이는 노동부대로 전속이 된다. 말이 군대지 수용소나 다를바없는 그곳에서 루드비크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길에서 내던져졌다는 것을 느낀다. 쿤데라는 이미 젊었을 때의 작품활동으로 인해 탈당조치를 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적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이 묻어있는지 이 부분의 묘사는 굉장히 절절하다.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인격의 파괴는 루드비크에게서 순수성을 앗아가고 만다. 



그랬다. 모든 끈이 끊어져 있었다.

모두 끝났다. 공부, 운동에 동참하는 것, 일, 우정, 모두, 사랑도, 사랑을 찾아헤매는 것도 끝이었고 한마디로 의미 있는 인생의 행로

전체가 끝난 것이었다. 내게 남은 것은 시간 뿐이었다. ...


그렇게 해서 나는 내 삶이 연속성을 상실했다는 것, 그것이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는 것, 이제 나는 결국 아무 가망 없이

내가 놓여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마저도,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내 시야는 이 비인격화의 어스름에 적응해갔고 주변 사람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단절의 경험은 루드비크의 젊음을 앗아갔지만, 그로 하여금 어떤 의미에서는 성숙의 계기를 주었다. 물론 그 성숙은 "새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루드비크와 비슷한 처지였던 다른 공산주의자 알렉세이는 그 성숙을 얻을 수 없었기에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그를 무엇보다도 한 젊은이로, 연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보게 된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 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시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연기를 한다.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희랍 비극 배우의 장화를 신고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으로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들을 외워서 읊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 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네로라는 풋내기, 나폴레옹이라는 애송이,

흥분하여 날뛰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흉내내는 열정이나 간단하게 맡아 버린

역할들은 처참하도록 실제적인 현실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미성숙 이야기를 하니 알렉세이가 생각난다. 그 또한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넘어서는 커다란 역할을 연기했다.

그에겐 우리 중대장처럼 자기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삶이 자신에게

부과한 이 커다란 시련을 이겨 내야 하며 당을 배신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피곤하지 않았던 사람이 누군가?" 알렉세이가 대답했다. "접니다." "아, 자네가 그랬나?" 그를 뜯어보며

중대장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어떻게 자네는 피곤하지 않았던 거지?" "저는 공산당원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세이는 영창으로 가기 전에 꼭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는 내가 공산당원답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는 엄격한 눈빛으로 내게 사회주의를 옹호하는가 아닌가 물었다. 나는 사회주의를 옹호한다고, 그러나 여기 검정 표지

부대에는 바깥과는 다른 경계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즉 자신의 운명을 잃어버린 사람과 다른 이의 운명을 빼앗아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사람이 있을 뿐이므로, 그런 것은 전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대답했다.


이제 스타나도 없고, 나와 가장 친한 혼자도 없고(이후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는 군복무를

마치고 몰래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고 한다.) 알렉세이도 없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광신적 역할을

맹목적으로 그리고 꿋꿋하게 해낸 것이다. 느닻없이 그 역할을 할 수 없게되었다든가, 또 더 이상 개의 탈을 쓰고

대열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따든가, 그만 힘이 다하고 말았다든가 하는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

..



체코 감독 Jaromil Jires의 <농담>

ideal communist였던 알렉세이의 죽음을 회상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굉장히 재밌어보이는데 구하고 싶다..ㅠㅠㅠ

이 영화도 프라하의 봄 이후에 당연히 금지처분.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어떤 리뷰들, 꼭 지목하지 않더라도 어떤 질떨어진 책에는 이런 어구들을 마치 젊은이들을 훈계하는 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야한다. 그들 자신은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지. 좋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루드비크가 삶에 대해서 한발자국 떨어져서 성찰할 수 있게 된 것은 가혹한 역사의 폭력과 루치에와의 사랑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잃어버린 젊음이라는 것, 전성찰적인 삶을 중단시킨 건 단지 그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젊음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젊음과 혼동하지 않기로 하자. 이왕 말 나온 김에(사실 어느 맥락으로 섞어야할지 혼란스럽다) 그에게 성찰과 또다른 단절을 안겨준 이는 소설에서 또다른 농담과 역설의 주인공인 루치에라는 여자이다. 성폭행에 의해서 남자를 불신하게 된 루치에와 루드비크는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 사랑을 이룰 수는 없었다. 사랑으로부터도, 그러니까 단절 이전에 해왔던 사랑의 방식도 루드비크는 박탈당한 셈이다.



그 당시 내 안에는 사막이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사막 속 사막이었고, 루치에를 부르고 싶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미친 듯이 그녀의 몸을 탐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 내가 루치에를 잃은 바로 그 순간부터 그 모든 절망과 공허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잠시 들른 고향 도시에서 이 진흙 투성이 변두리 풍경을 바라보며 다시 그때 일이 떠올랐다. 그렇다,

바로 그때에서야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생각을 하기도 싫고, 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싫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자기가 신봉하던 운동에 의해

거부당했던 이들이 오늘날 자기 운명을 대단하게 떠벌리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 그렇다, 나의 전락에는

그 어떤 진짜 드라마도 선행되지 않았고, 나는 내 이야기의 주체라기보다는 차라리 대상에 가까웠으며,

그러므로 (외로움, 깊은 슬픔, 실패 등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내 이야기를 가지고 무언가 대단한 척 내세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군대에서 돌아온 후 겨우 대학으로 돌아가서 학업을 마치고 성공한 과학자가 된 루드비크 앞에 우연스럽게도 제마네크의 처 헬레나가 등장한다. 사랑을 갈망하는 헬레나에게서 루드비크는 그를 배신한 제마네크에게 복수를 할 기회를 포착한다. 그래서 루드비크는 고향 브르노(Brno)에서 모라바의 축제를 취재할 것을 빌미로 헬레나와 불륜을 저지를 계획을 세운다. 아이러니한 것은 완전한 사랑이란 걸 더이상 찾지 않는(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루드비크에게서 헬레나는 그녀를 사로잡았던 사랑을 갈망하고 그 아이러니는 자살해프닝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결과로 돌아온다. 세상에, 자살소동에 설사약이라니. 이런 극단성들을 밀란 쿤데라는 그의 저작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참을 수 없는...>에 등장하는 스탈린의 아들과 똥, <웃음과 망각의 책>에 나오는 신과 천사들에게 대장이 있을까라는 질문 등등. 인간은 성과 속으로, 선과 악으로 범주화하려하지만 가장 신성한 것에도 대장이 있고, 가장 더럽고 구차한 일에 형이상학적인 고결함이 있는 아이러니, 그리고 농담만을 포착하게 된다. 여튼 나중의 저작들에서 철학적인 냄새들이 더 난다면, 농담에서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기법은 나중의 저작들보다는 더 가볍고 덜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본인은 철학과 소설의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지만 말이다.



한편, 그의 친구인 야로슬라프는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현대의 풍경과 잇고 싶어한다. '왕들의 기마 행렬'이라는 지역 축제의 책임자인 그는 점점 열기를 잃어가는 축제와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전통을 이해하지 못 하는 가족들에게 상처를 받고 있다. 이부분에서 쿤데라의 음악적 소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쿤데라의 아버지는 야나체크의 지지자이자 브루노에 설립된 "야나체크 뮤직 아카데미"의 기관장이었던 음악사회학자이자 피아니스트였다. 쿤데라의 에세이에도 언급되지만 그는 그래서 피아노를 배우고 음악사회학과 작곡을 배운 배경을 가지고 있다. 야로슬라프가 화자가 되는 부분에서는 심지어 악보가 등장하는데, <참을 수 없는..>에서도 베토벤의 테마가 나오듯이 그의 소설에서 음악을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체코, 그리고 모라비아의 역사로 돌아가서 그것을 계승하려는 야로슬라프를 루드비크는 참을 수 없어한다. 오래전에는 같이 침발롬 악단에서 전통음악을 연주하던 사이었고 야로슬라프에게 미래의 음악에 사회주의가 미칠 영향에 대해서 강변하던 루드비크지만 군대에 갔다온 이후엔 그에게 전통음악을 옹호하고 개작하는 작업은 공산당의 유토피아에 불과할 뿐이었다. 



루드비크와 비슷한 처지의 코스트카는 루드비크와는 정반대의 기질과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적으로서의 애정 역시도 가지고 있다. 루드비크에게 그는 믿을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적이다. 수용소 생활 이후의 루드비크는 공산주의나 기독교의 유토피아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하지만, 코스트카는 당국에게 받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독교적 이상을 가슴에 품고 있다. 물론 그는 상당히 '진보적인' 기독교인이기는 하지만 사회주의자는, 무신론자는 절대로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루드비크와 그는 절대로 의견이 합치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 오해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루드비크가 대학에서 쫓겨나고 얼마 안 있어 코스트카도 대학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때, 코스트카는 루드비크가 이루지 못한 사랑인 루치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루드비크가 가지지 못한 기독교적인 용서로 루치에를 치유한다. 치유한다라는 말은 참 좋지 않지만, 어쨌든 치유한다는 말이 적절할 듯 싶다. 그는 루드비크의 회의주의를 이해하지만, 루드비크가 수용소 이후 삶에 대해 품게된 적개심에 대해선 연민한다. 결국 루드비크가 루치에를 잃게 된 것은 그가 세계와 화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코스트카는 인간으로서의 화해와 용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만약 루드비크와 같은 상황에서 그의 삶에 가해진 폭력과 화해한다는 것은 오히려 일방적인 폭력을 용인하는 게 된다. 하지만 신의 사랑이라면, 그리고 이 지상에서 신의 사랑을 실천하려 한다면 그 폭력을 감내할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아마 니체가 노예의 도덕이라고 지적하는 지점이 정확이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쿤데라는 코스트카의 입을 빌어 기독교적 주제를 계속해서 연주하고 있다. 그러나 코스트카 역시도 성찰성을 기독교적 인식의 핵심으로 보고 있고, 그것을 종교성과 구분할 줄 아는 분별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반문한다. 자신의 믿음이 자신의 외도와 무책임함을 정당화하고, 죄의식을 기만하려는 속셈은 아닌지. 그리고 코스트카의 입을 빌어 농담에 대해서 쿤데라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약 나중에 농담이라는 제목의 의미, 아니면 농담이란 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질문을 받는다면 이 구절을 인용하면 좋을듯 싶다.



...당에서 축출된 이야기를 내게 상세히 설명해 주면서 당신은 내가 너무도 당연히 의견이 같으리라고, 또 동지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농담을 좀 했다고 해서 그들이 그렇게 편협하게 처벌을 가한 데 대해 내가 기막혀 하리라고 

굳게 믿었지요. 그게 어디 화를 낼 만한 일인가요? 당신은 진심으로 이상해하며 이렇게 물었어요.

 내가 이야기 하나 해 줄게요. 제네바에서 칼뱅의 말이 곧 법이 되던 때에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어쩌면 당신과 비슷하게

똑똑하고 농담도 잘 하는 친구였어요. 그런데 하루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에 대한 조롱으로 빼곡히 차 있는 그의 수첩이

발견되었지요. 그게 어디 화를 낼 만한 일인가요? 당신을 빼닮은 그 청년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어찌되었든 그는 

아무것도 나쁜 짓은 하지 않았고 다만 농담한 것뿐인걸요. 증오요? 그는 그런 건 알지도 못했어요. 그는 단지 조롱과 무심함만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처형되었지요.

 아, 내가 그런 잔인성을 편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위대한 운동 앞에서도 조소와 우롱이 용납될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부식시켜버리는 녹이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어떤 위대함이나 신성함, 그러니까 권력은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보다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야로슬라프가 루드비크의 개인적인 원한만 봤다면 코스트카는 루드비크가 어떤 지점에서 부당함을 느끼고 있는지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루드비크의 죄와 벌은 서로 딱 들어맞지 않는다. 농담한 게 죽을 죄인가? 무거운 존재, 혹은 저 하늘 위의 존재를 비웃는 게 죽을 죄인가? 그러나 어떤 지점에서는 그게 맞을수도 있다는 점이 아주 아이러니하다. 역사를 질주한 여러 운동들이 만약에 그 시작부터 부식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동양에서는 임금의 이름 자체를 언급하는게 불경했고, 현실과 유사성을 드러내는 이야기들 역시도 반역으로 취급했다. 또한 살만 루시디를 보라. 진지하고 신성한 것의 아우라는 그것이 웃음거리가 되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개인의 입장에서 이는 억울한 일이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리고 그런 결과를 가져올 줄도 몰랐는데. 루드비크와 코스트카는 농담이 어떻게 죽을 죄가 되었는지 깨닫게 되었지만, 루드비크는 그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코스트카는 증오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용서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순히 그 차이지만, 또한 아주 심원한 차이이기도 하다. 일단은, 나는 어느 편을 들 수 없다. 그리고 선택을 강요하는 것도 아닐 것이고...



 그 이후의 서사는 매우 단순하니 후딱 이야기하고 지나가도록 하자. 루드비크는 헬레나와 외도를 하며 제마네크에게 복수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제마네크는 젊은 여대생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루드비크는 자신이 생각하는 복수란 게 완전히 착각이었다는 점을 깨닫는다. 야로슬라프는 축제의 주인공이 된 아들을 보며 뿌듯해하지만, 정작 말에 탄 왕이 아들 본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알고 괴로워한다. 헬레나는 자살 시도를 하지만, 자살을 위해 먹은 약이 사실은 변비약이었고 루드비크는 안도한다. 자신이 생각하던 복수란 게 그냥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었다는 점을 깨달은 루드비크는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자신이 모른 척 하고 지나간 야로슬라프를 찾아나서고 들판에서 그들은 재회한다. 아주 오랜만에 루드비크는 야로슬라프의 연주회에 참석하기로 하고 클라리넷을 연주하지만, 야로슬라프가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게 되고, 복수를 위해 찾아온 도시에서 결국 쓰러진 친구를 안고 있다는 역설적인 이야기의 결말을 맞이한다.



어쩌면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운명이(몸이 더럽혀진 소녀의 운명이) 나의 운명과 닮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둘은 서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를 비껴갈 수밖에 없어겠지만, 우리 삶은 둘 다 유린의 역사라는 점에서,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나 결혼한 부부와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인지 모른다. 루치에가 육체적이 사랑을 유린당하고 그녀의 존재에 대하여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인생 또한 원래 의지하고자 했던 가치들을 빼앗겨 버렸다.

그것은 그 기원으로 돌아가서 보자면 아무 죄도 없는 결백한 것들이었다. 그렇다. 결백한 가치들이었다. (밑줄은 인용자)

비록 루치에의 삶에서는 유린당한 것이라 해도 육체적 사랑에겐 죄가 없었다. 내 고장의 노래들, 침발롬이 있는 악단, 그리고

내가 증오했던 고향 도시에 아무 죄가 없는 것처럼, 내게 구토를 일으키던 초상화의 주인공 푸치크, 그 사람 또한 나에 대하여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 잘못은 다른 데 있었다. 그 죄는 너무도 커서 그 그림자가 죄없이 결백한 사물들(그리고 말들)을

사방으로 온통 뒤엎었고 또 유린했던 것이다. 루치에와 나, 우리는 유린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세계를 불쌍히 여길 수 없었던

까닭으로 우리는 거기에 등을 돌렸고, 그리하여 그 세계의 불행과 우리 자신의 불행을 다같이 악화시키고 말았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러나 정말 제대로 사랑하지는 못한 루치에, 네가 여러 해가 지난 뒤 나에게 와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인가? 유린된 세계에 대한 연민을 청원하러 온 것인가?


"산들이 종이로 되어 있다면- 물이 잉크로 변한다면- 별들이 서기가 된다면- 드넓은 이 세상 전체가 그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면-결국은

이르지 못하리- 내 사랑의 유언으로." 가슴에서 바이올린을 떼지 않은 채 야로슬라프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리고 나는 이 노래들 속에서 

(이 노래의 유리 집 속에서) 행복했다. 거기에는 슬픔이 가볍지 않고, 웃음이 비웃음이 아니고, 사랑이 우습지 않으며, 증오심이 맥없지 않고,

사람들은 온몸과 마음으로(그래, 루치에,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며, 행복은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고, 절망은 다뉴브 강으로 뛰어들게 만들며,

그곳에서는 그러니까 사랑이 사랑으로, 고통이 고통으로 머물고, 아직 가치들이 유린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노래들 속에 나의 출구가 있고,

나의 본원의 표지가, 내가 배반한 나의 집,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나의 집인 집(배신당한 집에서야말로 가장 비통한 탄식이 솟아나오는 법이므로)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깨달았다. 이 나의 집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이 세상 것이 아니라면 그 집은 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가 노래하는 것들은 모두가 단지 추억이고 기념물이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으로 보존하는 일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느꼈다. 나의 집 바닥이 내 발빝으로 꺼져 내려앉는 것을, 그리고 내가 클라리넷을 입에 문 채 수십 년 수백 년의 심연 속으로, 바닥 없는

심연(사랑이 사랑이고 고통이 고통인 곳)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그리고 나는 유일한 나의 집은 바로 이러한 하강, 이러한 추락,

무언가를 찾고 갈망하는 이 추락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며 놀라고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소재는 아마 공산주의 사회의 경직성일 것이다. 피상적으로 이 소설을 읽는다면 이 소설은 좀 쎄지 않게 공산주의 체계를 비판하는 소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보다 더 넓은 맥락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소설에서의 인물들은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유형들이고, 체코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전체주의들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소설에서 인물들은 결백하지만, 그들이 품고 있는 결백한 가치들로 인해서 죄에 연루되었다. 루드비크가 박탈당한 사회주의, 헬레나의 사랑, 마찬가지로 루치에의 사랑, 야로슬라프의 전통, 그리고 그 가치들관의 관계는 깨끗했지만 역사 속에서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변모되었다. 사회주의, 구원, 사랑, 그것들은 모두 너무 쉽게 변질되어버린다. 그것을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쉽게 상해버리는 가치들이 뿜어내는 냄새는 그것들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가능성을 떠올려본다면 가엾이 여김을 받을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화해와 용서를, 그리고 연민을 바라는 거라면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좋은 소설이라면 그런 주제로 끝마무리지어야하지 않겠냐라고 하면, 쿤데라가 이야기하는 키치에 대한 정의에 비추어 그런 주장을 키치에 속했다고 대답해야한다.  가치의 본원적 속성과 타락에 대해서 우리가 기독교적인 어조로 구원을 이야기한다면 <농담>은 무한회귀하는 한 이론의 에피소드에 불과하게 되리라. 그것들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으며, 증오의 대상이 제마네크처럼 영원히 변화해서 끝내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붙잡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합리성의 분화와 세계의 탈주술화에 대해 베버가 내린 비관적인 결론처럼 '오해'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고 역사 속에서 영구히 반복될 과정들이다. 그러나 갈라져버린 세계의 불연속성을 소설적인 인식이 붙들어주지 않을까? 일단은 이 이상의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밀란 쿤데라의 저작들을 따라가며 그가 이러한 간극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인용 페이지 추가-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막 쓰고 있었기 때문에..., 보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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