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민음사 판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책 표지 이쁘네…

 

지난주에는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를 읽었다. 이렇게 시작하니 무척이나 방학숙제 느낌이 나지만, 뭐 독후감이니까! 토마스 만 하면 마의 산도 유명하고 이런저런 소설들 다 유명하지만 파우스트 박사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전적으로 밀란 쿤데라의 추천 덕분이었다. 내가 작업하고 있는 논문의 주제가 학문과 문학의 경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밀란 쿤데라가 가장 철학적인 소설을 쓰려고 노력했다고 토마스 만을 평했을 때 나도 모르게 끌려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 추천사(?)는 굉장히 엄밀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파우스트 박사』가 다루고 있는 주제인 독일 문제는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더 내려가면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소급되는 아주 뿌리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가벼운 문제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토마스 만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온 하나의 민족, 문화, 문명에 대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은 신중하고 매우 무겁게, 그리고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이러한 경향의 소설은 토마스 만까지만 가능한 소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누가 민족과 문명의 운명에 대해서, 특히나 유럽에 대해서 새로운 글을 쓰겠는가. 오히려 민족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운 세계의 소설들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다.



토마스 만, 성격있게 생겼다.

 

우선 파우스트 박사를 다루기 위해 근대성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 철학자들에게 끊임없이 근대성이라는 주제는 변주되는데, 그것은 이런 3악장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분화되지 않은 세계의 총체성 → (도구적–주관적 이성의 발전) –탈주술화 → 세계의 분화, 총체성의 상실

독일의 늦은, 그러나 충격적인 근대화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총체성의 상실은 독일 지성사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였던 모양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티즘은 가톨릭에서 사제가 가지고 있던 은총과 구원의 매개로서의 역할을 제거하면서 논리적으로 구원의 문제를 윤리의 문제에서 분리시킨다. 토마스주의에 따라 신의 의지에 종사하던 이성은 더 이상은 신의 뜻을 살필 수 없게 되었고, 근대인들은 이제 다른 누구의 힘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와 금욕적인 생활로 알 수 없는 구원을 확신해야 하는 위치에 놓였다. 지성사적인 흐름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와 자본주의의 출현은 윤리와 도덕을 지탱하던 공동체의 총체성을 파괴했다. 더 이상 '신'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 윤리를 어떻게 보증할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칸트를 거치면서 윤리는 인식과 엄정하게 분리된다. 정언명령은 인식에서 벗어난 윤리를 구제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였다. 베버는 근대의 이런 흐름을 절망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정신과학 혹은 문화과학은 특정한 목적과 결과의 측면에서 합목적성을 분석하고 인식할 수는 있지만 그 목적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물리적 자연의 총체성은 이미 당대 과학의 패러다임이 된 자연과학의 결과로 해체되었고, 인간 자연의 총체성은 문화과학이 과학적인 방법론을 확립하든, 확립하지 못 하든 지켜내지 못할 것이었다. 카프카의 『성』은 여러 작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합리화된 근대, 총체성이 상실된 세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K는 이유도 모른 채로 재판에 회부되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아무도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말해주지 못 한다. K조차도 그 문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보인다. 아무 것도 인간에게 옳고 그름을 말해주지 않는다. 아니 말할 수 없다가 맞을 것이다.

총체성이 상실되어 버린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끊임없이 분화를 진행시키지만 일반적인 윤리는 제공할 수 없는 계산적인 이성이다. 주관적 이성, 도구적 이성, 여하튼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그것을 이제 파우스트 박사라는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악마성과 아주 직관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주인공인 레버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주관적이고 도구적인 합리성으로 인해 공동의 가치가 결핍되어 음악이, 더 나아가 예술 자체가 목적성을 상실해버린 시대이며 곰팡이가 슨 자유 속에서 불임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그는 잃어버린 총체성으로의 연결고리를 찾거나, 음악을 근거하려 한다. 『파우스트 박사』에 나오는 음악이론은 저자가 뒤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쇤베르크의 12음 이론을 따왔고, 또 동시에 아도르노의 음악이론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파우스트 박사에서 나타나는 아도르노 사상과의 관계는 김창준의 2002년 논문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와 아도르노의 음악철학"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논문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레버퀸의 음악은 끊임없이 음악의 근대적인 휴머니즘을 조롱하고 해체하면서 원시성으로 회귀한다. 그는 불안정한 근대 음악의 가상적인 형식성을 해체하고 음악의 요소들을 다시 재조직함으로써 음악의 총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극도로 악마적이고 폭력적인 시도로도 보일 수 있지만, 또한 비판적인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레버퀸의 마지막 곡인 파우스트 박사의 비탄은 베토벤 9번 교향곡에서 이야기되었던 인류애와 자유를, 실패한 자유주의적 화해를 거부하고 비판한다. 기만과 가상들을 철저히 해체한 이성은 모순된 현실을 마주하고 포착한다. 그러므로 레버퀸의 음악은 야만적이고 퇴행적이며 어쩌면 반인간적인 모습을 띄고 있지만 예술적인 정신은 미학적으로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세계를 모방하고 정복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파우스트 박사가 간척사업을 통해서 자연을 길들이고자 했던 시도와 음악을 통해 붕괴되어 가는 세계에서 구원받고자 했던 레버퀸의 시도는 같은 선상에 있다. 물론 그 결과는 알 수 없다.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 의해서 구원받지만, 레버퀸의 파우스트 박사에게 남은 것은 인간적인 탄식이다. 그러므로 레버퀸의 시도는 휴머니즘이 실패한 목표를 위한 반휴머니즘, 진보를 겨냥한 회귀라고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하지만 물론 그 결과는 알 수 없다. 더 이상 천상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고, 변신론들의 주제가 되는 것처럼 신은 보이지 않는데, 남은 건 비탄과 한숨, 그리고 벌거벗은 인간뿐이다.

이 소설을 단순히 나치즘 비판이라고 읽기에는 토마스 만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미학의 목표가 너무 큰 것 같다.



+생각해보니, 파우스트 박사를 보고 나중에 든 생각이 있어서 여기에 적어야겠다 생각했는데, 까먹고 있었다.

요즘에 하도 갑갑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옛날에 읽은 역사책들이 생각나면서 '유럽'이, '독일'이 모두 좌초한 꿈이라면 '한국'이란 꿈 역시도 예외는 아니리라는 생각. 독일 민족의, 독일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모든 꿈과 노력들, 희망과 절망, 피와 땀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최후를 맞이했다면… 우리는, 우리 한국인의 꿈은 어떻게 될까. 수천년의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자유와 평등을 생각했던 사람들. 독립과 전쟁, 그리고 독재와 민주화같은 굵직굵직한 일들이 차례로 있다가 결국 우리가 도달할 지점이 조로해버린 그저 그런 국가와 사회라면. 이도 역시 밀란 쿤데라가 이야기한 건데 종말은 막 우르릉꽝꽝 굉음을 내면서 오는 건 아니라고 했다. 한국이라는 꿈도 역사 속에서 수없이 명멸해간 국가들처럼 소리없이 사라지고 잊혀져버린다면. 10세기 무렵의 중세인들은 아무도 오래전에 나누었던 자유와 시민, 보편과 이상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니체식으로 표현하면 한국 민족의 기력이 쇠약해지고 그 쇠약의 징후로 데카당스가 유행하는데, 요즘의 정치와 사회는 그런 쇠락의 징후가 두드러지는 것 같다. 도대체 누가 이 시대에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자유와 평등이란 게 한순간의 꿈이었을 뿐이라는 식의 데카당스를 사람들은 더 좋아하리라. 아니면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한국식 민주주의'에 저질스럽게 이어붙이거나.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이 있고 우리가 소명을 받은 민족이라면, 우리가 이루어낸 것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프로파간다들은 우리의 발전에 자부심을 느끼고,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 이들은 모두 국가의 적으로 몰아버린다. 그러나 쇠락의 징후가 명확해질 때 그것을 알리는 이들이 어떻게 국가의 적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자부심을 느낄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까. 부끄러워하고, 그런 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일을 반국가적이라고 몰아갈 때, 국가는 국가의 미래에 반하고 있다.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32번은 형식적인 파격성으로 유명한 곡이다.

소나타 형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제시부-전개부-재현부로 나뉘어져 있고, 교과서에서 본 걸 기억하자면 A-B-A' 이런 식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음악은 무엇보다도 엄밀한 계산과 형식미가 존중되는 분야고, 특히나 이런 이상은 고전주의 시대에는 아주 중요한 것임을 기억하자.


이 소나타의 2악장은 마치, 열차에서 헤어지기 전에 느끼는 그런 마음을 담은 것 같다.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들 있잖아, 머뭇머뭇거리던 연인이 막상 열차가 달리니까 막 뛰어가는 그런 장면.

만약 우리의 사랑을 A-B-A'라는 형식으로 계속 말해야한다면, 그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그 형식에서 벗어나서 사랑을 노래하고 싶으리라.

2악장의 파격을 나는 다소 우발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베토벤같이 치밀한 음악가에게 있어서 우발적인 파격은 큰 의미를, 어쩌면 보다 사소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시간이 없는 사랑에게 지금까지 잘 지켜왔던 형식의 엄격함을 벗어나는 일은 더 큰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는 음악 자체의 논리로 들어가면서 점점 인간적인 것과 멀어지던 음악의 제왕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점들은 토마스 만의 글을 읽으면 좀 더 명확해진다.



그의 강연 주제는 무엇이었던가? 이를테면 그는 '왜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작품 111번에서 제3악장을 쓰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꼬박 한 시간이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 제1악장에 대응되는 제3악장을 왜 생략했는가에 대한 베토벤의 해명을 신랄한 위트로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베토벤은 조수가 그런 질문을 하자 시간이 없어서 아예 제2악장을 늘렸노라고 태연하게 답했다는 것이다.시간이 없다니! 게다가 '태연하게' 그런 말까지 했다니. 그런 식의 답변이 질문자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정당한 경멸이었다. ... 그러고서 크레추마어는 바로 그 소나타 다단조에 관해 말했는데, 사실 그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되고 정신적 균형이 갖춰진 작품이라 보기 어려우며, 당시의 비평가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풀기 어려운 하나의 미학적 수수께끼가 되었다고 했다. ...  바로 그런 점에서 그들은 베토벤이 과거에 추구했던 경향이 퇴화하고 지나친 심사숙고와 과도한 엄밀성 및 음악적 과학성이 나타난다고 보았던 것인데, 그런 요소들이 때로는 이 소나타의 제2부를 이루는 기괴한 변주곡에 포함된 아리에타 주제 같은 아주 단순한 소재에까지도 적요되었다는 것이다. 갖가지 리듬이 대비되면서 펼쳐지는 온갖 운명과 숱한 세계를 헤쳐 나가면서 제2악장의 주제가 점점 확대되어 마침내는 그 자체를 벗어나, 피안이나 추상 세계라 할 수도 있는 아득한 높이로 사라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 왜냐하면 정점에 도달한 전통을 이미 극복한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은 바로 그 객관성 속에서 스스로를 자신 이상으로 확장시키고 그리하여 위대하고 신비한 신화적 세계, 집단적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파우스트 박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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