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데라:

아녜스는 누구인가?

이브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처럼, 비너스가 물거품에서 탄생한 것처럼, 아녜스는 내가 수영장에서 보았던 그 육십 대 부인의 몸짓에서 튀어나왔다. 손을 들어 수영 선생에게 작별인사를 하던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내 기억에서 흐릿해진다. 그때 그녀의 몸짓은 나에게 어떤 엄청난, 불가사의한 향수를 일깨워 주었으며, 바로 그 향수가 내가 아녜스라고 이름붙인 인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소설의 인물은 특히나 더, 흉내 낼 수 없는 어떤 유일한 존재로 정의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A라는 인물에게서 관찰된 그 몸짓, 그녀를 특정 지우고, 그녀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 내며, 그녀와 더불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던 그 몸짓이 동시에 B라는 인물의 본질이 되고, 그녀에 관한 내 모든 몽상의 본질이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 점은 성찰을 요한다.

만약 우리 지구의 인구가 800억을 넘어섰다면, 그들 각자가 자기만의 몸짓 일람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있음직하지 않은 일이다. 산술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의 사람 수에 비해 몸짓 수가 비교도 안 될 만치 적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충격적인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즉 몸짓이 개인보다 더 개인적인 것이다. 이를 격언 형태로 얘기하면, 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가 된다.

첫 장에서 나는 수영복 차림의 부인에 대해 그 몸짓 덕택에,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그녀 매력의 정수가, 그 촌각의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틀린 생각이었다. 결코 그 몸짓이 부인의 정수를 펼쳐 보인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부인이 한 몸짓의 매력을 드러내 보인 거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몸짓은 한 개인의 소유로 간주될 수도 없고, 그의 창조물로 간주될 수도 없으며그의 도구로 간주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이다. 말하자면 바로 몸짓들이 우리를 사용하며, 우리는 그들의 도구요, 꼭두각시 인형이요, 그들의 화신인 것이다.

 

 

보르헤스:

모든 철학서 가운데서 가장 비통한 책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은 플라톤의 파이돈이다. 이 대화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오후를 다루고 있다.소크라테스는 사형이 집행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감방으로 맞아들인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를 맞아들인다. 막스 브로드Max Brod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이 일생에 썼던 가장 감동적인 구절을 본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파이돈]는 플라톤이 아팠다고 생각합니다." 방대한 대화편을 쓴 플라톤은 여기서 단 한 번 자기 이름을 불렀다고 브로드는 말했다.

나는 플라톤이 "저는 플라톤이 아팠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형언할 수 없는 문학적 아름다움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어 감탄할만한 대목이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침대에 앉아 있고, 사람들이 족쇄를 풀어주었다. 그는 무릎을 문지르고, 이제는 쇠사슬의 무게를 느끼지 않아 기쁘다고 하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참 이상한 것이야. 쇠사슬이 무거워 발이 아팠는데, 이제 쇠사슬을 풀어버리니 가벼워진 느낌이군. 기쁨과 고통은 함께하는 것이야. 그 둘은 쌍둥이 같은 것이지."

그 순간에,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고통은 분리불가능하다고 성찰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탄스러운가. 이것은 플라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우리에게 용기 있는 한 인간을, 곧 죽게 되지만 임박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얘기를 하지 않는 인간을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날 오후 소크라테스는 친구들과 토론을 했을 뿐, 가슴 아픈 작별을 원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부인과 자식들을 내보냈고, 울고 있는 한 친구를 내보내고 싶어했다. 그는 침착하게 토론을 하기를 바랐다. 그저 대화를 하고 사색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죽으리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의 임무는, 그의 습관은 토론하는 것, 여러 가지 방식으로 토론하는 것이었다. 왜 그는 독당근즙을 마시려고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은 재미 있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 오르페우스는 나이팅게일로 변해야만 했고, 사람들의 목자 아가멤논은 독수리로 변해야만 했으며,소크라테스는 이야기를 계속하지만 죽음이 이를 중단시킨다. 이미 그는 독당근즙을 마셨던 것이다. 그는 아스클레피오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치기로 맹세한 사실을 생각해내곤, 친구에게 이를 부탁한다. 의약의 신, 아스클레피오가 본질적인 악으로부터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가야 한다. “나는 아스클레오 신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네. 내 생명을 구해주었거든. 이제 나는 죽을 것 같네.” 바꿔 말해서, 그는 자신이 앞서 얘기했던 것을 믿지 않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죽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고전으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가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개인적인 불멸을 부정한다.

 

 

쿤데라:

불멸. 괴테는 이 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Dichtung und Wahrheit’, ‘시와 진실이라는 유명한 부제가 달린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는 열아홉 살 청춘기에 라이프치히의 새로운 극장에서 열심히 지켜보곤 하던 막()이야기를 한다. 막의 배경에는 “der Tempel des Ruhmes”(괴테의 말이다.) 영광의 사원이 그려져 있었고, 사원 앞에는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극작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 한가운데에, 그들 쪽으로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옷차림이 가벼운 한 인물이 사원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등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에게선 어떤 비범한 구석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선구자 없이, 다른 위대한 모델들에게는 무관심한 채,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불멸을 만나러 걸어간 그는 바로 셰익스피어였다.”

물론, 여기서 괴테가 말하는 불멸은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른 불멸,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자들의 세속적인 불멸이다.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다. 작은 불멸, 말하자면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모라비아 마을의 그 시장이 꿈꾸던 불멸)큰 불멸, 즉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은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 어느날 갑자기 한 사람을, 도무지 사실 같지 않고 있음직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이론의 여지없이 가능한 그런 엄청난 불멸에 맞닥뜨리게 하는 생애들이 있다. 바로 예술가와 정치가의 생애가 그렇다.

사람은 불멸을 갈망하지만, 어느 날 카메라는 쓰라린 경련으로 일그러진 그의 입을 우리에게 보여 주며, 그것만이 우리에게 남아 그의 전 생애를 요약하는 하나의 우화로 탈바꿈하고, 그리하여 그는 소위 우스꽝스러운 불멸 속으로 들어간다. 티코 브라헤는 위대한 천문학자였지만, 오늘날에는 프라하 황궁에서 일어난 그 유명한 식사 사건 외에 우리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식사 도중 화장실에 가고 싶은 욕구를 점잖게 참다가 기어이 방광이 터지고 말았는데, 이로써 그 수줍음과 오줌의 순교자는 곧장 우스꽝스러운 불멸자들의 일원이 되고 말았. 나중에 영원히 얼간이 뚱뚱보로 변해 버린 크리스티아네 괴테가 그렇듯 말이다. 소설가들의 세계에서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로베르트 무질이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아령을 들다가 죽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다 아령을 들 때면 혹시 나도 죽는 게 아닐까 하고 겁을 내며 맥박에 주의를 기울인다. 만약에 내가, 나의 소중한 작가처럼 손에 아령을 든 채로 죽는다면, 그로써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열렬한, 열렬하다 못해 광신적이기까지 한 한 사람의 아류가 될 것이고, 곧바로 나에게도 그런 우스꽝스러운 불멸이 보장될 테니 말이다.

 

로돌프 황제 시대에도 카메라(바로 카터 대통령을 불멸로 만든 것)가 있어, 티코가 의자 위에서 괴로워하고, 하얗게 질리고, 양 무릎을 비비 꼬다가, 허옇게 눈을 까뒤집고 말았던 그 궁정에서의 식사 장면을 필름에 담았다고 상상해 보자. 만약 그가 자신의 그런 모습을 무수한 방청객들이 관찰하리란 걸 알 수 있었다면, 그의 고통은 아마 열 배는 더 증폭되었을 것이며, 웃음 또한 그의 불멸의 회랑들에서 훨씬 크게 울려 퍼졌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뭔가 재미있는 화젯거리를 찾는 국민들은 틀림없이, 소변보는 걸 부끄러워했던 이 유명한 천문학자의 영상 자료를 성() 실베스트르 축일 때마다 상영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보르헤스:

살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으며, 물질을 통하여, 물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열어가는 무엇이 있는데, 이 무엇이 바로 쇼펜하우어가 의지(wille)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는 세계를 부활의 의지로 보았다.

끝으로 쇼우는 생명력(life force)에 대해 이야기했고, 베르그송은 엘란 비탈(élan vital)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들에게 하등의 중요성도 없다. 내가 우리들을 느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보르헤스임을 느낀다는 것과 여러분이 A이고 B이고 C라고 느낀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전혀 아무런 차이도 업다. 이러한 자아는 우리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 속에 이러저러한 형태로 현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멸이 필요하다고는 말할 수 있으나, 이러한 불멸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불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적을 사랑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불멸은 드러난다. 그런 순간에 그는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단테나 셰익스피어의 시구를 반복할 때마다 우리는 어느 의미에서 그 시구를 창작했던 순간의 단테나 셰익스피어이다. 결국, 불멸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으며 우리가 남겨놓은 행위 속에 있다. 이러한 행위가 잊혀진들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우리들 각자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이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들 각자는 이 세상이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 만약 이 세상이 개선된다면 희망은 영속할 것이다. 조국이 구원받는다면조국이 구원받아서 안 될 일이 있는가?우리는 그 구원 속에서 불멸할 것이다. 우리들의 이름이 알려지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는 아주 사소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불멸이다.

 

 

쿤데라:

모든 독일 어린이들이 외워야 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독일 시 한 편이 여기 있다.

 

산봉우리마다엔

침묵이,

나무들 꼭대기에서도

너는 느끼지 못한다

여린 숨결 하나,

어린 새들은 숲 속에서 침묵하고 있다.

참으렴,

너도 휴식을 얻을 테니.

 

이 시의 시상은 너무나 단순하다. 숲이 잠들고, 너도 곧 휴식을 취하게 되리라는 것. 시의 소명은 어떤 놀라운 관념으로 우리를 현혹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을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는 데 있다.

번역에서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오직 독어 원어로 읽을 때만 이 시의 아름다움을 알게 될 것이다.

 

Über allen Gipfeln

Ist Ruh,

In allen Wipfeln

Spürest du

Kaum einen Hauch;

Die Vögelein schweigen im Walde.

Warte nur, balde

Ruhest du auch.

 

이 시의 시구들은 음절수가 모두 다르고, 장단격, 단장격, 장단단격이 교차하며, 여섯 번째 시구는 다른 구절들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길다. 그리고 4행 절 두 개로 이루어진 시인데도, 문법적 첫 문장이 비대칭적이게도 다섯 번째 시구에서 끝나면서,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너무나 멋진 이 한 편의 독특한 시 외에 다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음률을 만들어 낸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헝가리에서 이 시를 배웠다. 아버지가 독일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로, 아녜스 역시 같은 나이 때 아버지에게서 처음으로 이 시를 들었다. 그들은 산책 도중 함께 이 시를 암송했으며, 강세 음절을 만날 때마다 터무니없이 강조하면서 시의 리듬을 맞춰 걸었다. 운율이 복잡해서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그들이 온전히 성공적으로 박자를 맞춘 것은 최종 두 시구에서뿐이었다. 바르-테 누어--/-에스트 두-아우흐. 맨 마지막 단어는 너무나 크게 외쳐져, 반경 1킬로미터 내에서는 누구나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이 시를 암송해 준 것은 임종 이삼일 전이었다. 처음에 아녜스는 아버지가 자신의 유년기로, 자신의 모국어로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가 아버지가 자신의 두 눈을 친근하게, 뭔가 말을 하듯, 뚫어지게 쳐다본 점을 생각해서, 지난날의 그 행복한 산책들르 그녀에게 상기시켜 주고자 한 것으로 고쳐 생각했다. 그러다 나중에야 그녀는 이 시가 죽음에 대해 말한 것임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곧 죽으리란 것과, 그것을 알고 있음을 그녀에게 말해 주고 싶었던 거였다. 그녀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배우는 이 천진한 시구들에 그런 의미가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마에 땀이 가득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그의 눈물을 훔치면서 그와 함께 나지막이 암송했다. 바르테 누르, 발데 루헤스트 두아우흐너도 곧 휴식을 얻을 테니.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죽음의 소리를 알아듣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나무들 꼭대기에서 잠든 새들의 침묵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침묵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넓게 퍼지면서 아녜스의 영혼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다시 한 번 말하자. 그것은 나무들 꼭대기 위에서 잠든 새들의 침묵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마치 깊은 숲 속에서 울리는 뿔피리 소리처럼, 아버지의 마지막 메시지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또렷이 울려 퍼졌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긴 선물로써 하려했던 얘기는 무엇일까? 자유롭게 살라는 것, 그녀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는 거였다. 아버지는 감히 한 번은 그렇게 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딸에게, 딸만은 과감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들을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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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은 불멸에 관한 보르헤스의 강연이고 뒤의 글은 불멸이라는 이름의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다. 보르헤스는 불멸에 대해선 정몽주보다는 이방원에 가깝다. 그것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우리의 존재양식 그 자체이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에게 그것은 참을 수 없는것이다. (“우리 뒤에 뭔가를 남겨둔다고?” 놀란 듯한 회의적인 어조로 아녜스가 되물었다.) 오직 완전한 소멸만이 밀란 쿤데라의 주인공들에게 휴식을 가져다줄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니체를 인용한 그의 사유를 생각해보자. 반복은 존재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주면서 동시에 유한성으로 인해 형성된 고유의 의미를 파괴한다. 어떤 사건이 다시 반복가능하다는 점은 어떤 점에서는 매혹으로, 어떤 점에서는 끔찍한 형벌로 다가온다. 아녜스와 아버지가 암송한 시에서 울려퍼지는 존재의 한 순간은 모든 존재의 목소리들로부터 벗어난 침묵이고, 그 침묵은 자유요 해방이다. 쿤데라의 인물들에게 보르헤스의 목소리는 그들이 영원회귀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다시는 괴테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운명을 부르짖는 예언자처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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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로 괴테의 저 시는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가곡집에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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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나라도 이렇게 표지만들면 안 될까.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 대해서 리뷰하도록 하자! 


불멸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중에서도 제법 길고 두꺼운 책이다. <농담>이나 <이별의 왈츠>처럼 경쾌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좀 더 무거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과 망각의 책>과 상당히 비슷한 외양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분량이 길다기보다는 여러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있고, 그 이야기들이 중첩되어서 보여주는 색깔이 복잡미묘하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은 쿤데라의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꽤나 어려운 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불멸>이 뭐에 대한 이야기다, 딱딱 이야기할 수 있는 자신은 없다. 그러므로 천천히 여러 이야기들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선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갈등구조인 아녜스-로라의 대칭쌍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소설에서 두 자매는 끊임없이 쫓고 쫓기는 경주를 펼치고 있다. 아녜스는 우스꽝스러운 불멸에 대해서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의 다른 책제목인 <배신당한 유언들>처럼 어떤 개인의 유산은 그가 지상을 떠나는 순간 더이상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혹은 그녀의 유산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 그것이 산 사람의 죽은 이에 대한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아녜스는 그녀의 몸짓을 로라에게 빼앗겼을 때의 불쾌감은 자아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당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자신과 로라의 운명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현대성의 병폐는 자아에 대한 타자의 무자비한 침범과 또 그것이 정당화된다는 점에 있다. K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조차도 타자들은 성실하게 관찰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가. 그래서 아녜스의 아버지는 죽은 아내의 사진을 불태우고, 집을 떠나서 혼자 살기를 원하고, 임종이 다가와서는 아녜스를 그만 보기를 원했다. 아녜스와 그녀의 아버지는 오롯이 기억되기를 원한다. 그 기억은 그 유산을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자들에게만 허용되어야 했다. 그런 이들에게 원하지 않는 불멸, 불멸이라는 소송은 원치 않는 존재의 징벌이다. 



역사와 현실 속에서 항상 이기는 쪽은 미래다. 불멸이란 법정에서 정의는 항상 미래에 있다. 정의란 미래에 속해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해도 될까. 『소설의 기술』에 나오는 것처럼 미래는 과거에 대해 당당하게 권력을 행사한다. 아녜스는 끊임없이 로라를 따돌리고자 노력했지만 끝내는 자신이 따라잡히리라는 사실을 안다. 괴테 역시도 '이 귀찮은 쇠파리(diese leidige Bremse)' 베티나가 끝내는 자신의 유언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괴테와 베티나는 이 소설의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대립쌍이다. 영민한 베티나는 불멸을 향해 걸어가는 괴테의 모습을 보았고 내 생각으로는 그 불멸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베티나는 괴테에게 어린아이로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무릎에 앉는 베티나에게 괴테는 매혹되었지만 곧 괴테는 베티나의 관심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베티나가 그에게 편지로 전한 말 "나에겐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리라는 굳고 견고한 의지가 있답니다."라는 문구에서 베티나의 관건은 '영원히'와 '의지'였던 것이다. 베티나는 괴테에 대한 책을 쓰기를 원했고, 괴테의 편지를 출간하기를 원했고, 괴테의 연인으로 기억되고 싶어했다. 그녀에게 괴테의 다른 부분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세계의 다른 여러 부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베티나와 로라는 그래서 무언가를 얻어낼 때의 몸짓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금 당신들이 하는 말에 난 흥미 없어요. 난 회계사가 아녜요. 나란, 바로 이런 인간이에요!" 라고 대답하며 그녀는 손가락 끝을 가슴에, 정확히 두 젖가슴 사이에 얹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가볍게 뒤로 젖히고 얼굴을 미소로 가린 채 두 팔을 갑작스럽게, 그러면서도 우아하게 앞으로 던졌다. 동작 초기에는 손마디들이 모두 붙은 상태였으나, 마지막 순간에 두 팔이 떨어지면서 두 손바닥도 활짝 펼쳐졌다. 

 그렇다. 여러분의 기억은 정확하다. 앞 장에서 '뭔가' 하고 싶다고 말할 때 로라가 바로 그런 몸짓을 했다. 그 사황을 돌이켜 보자. …

 베티나와 로라의 그 몸짓을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 명명하자. 큰 불멸을 갈망하는 베티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길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작은 불멸을 희망할 뿐이지만, 로라 역시 같은 것을 원한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자신이 겪는 불행한 순간을 초극하여, 자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베티나와 로라의 불멸 속에서 괴테와 아녜스는 불멸하는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남을 것이다. 베티나는 괴테를 찬미했지만 또한 귀족 앞에서의 모자사건처럼 괴테를 우스꽝스러운 불멸로도 기억하게 만들었다. 불멸의 소송의 당사자가 된 괴테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괴테가 불멸이라는 법정에 대해 두려움에 떠는 헤밍웨이에게 이야기하는 구절은 <I'm not there>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쿤데라가 괴테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것은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미지 안에 보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괴테는 죽고 오직 그의 책들만이, 그의 유산만이 남을 뿐이다. 물론 괴테는 모두가 그 뒤에 남을 이미지에 대해서 신경쓴다는 인간적인 실수는 인정한다. 쿤데라가 그리는 괴테 역시도 그런 실수로부터 벗어날 순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소송이 괴테 그 자신에게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괴테는 노발리스가 이야기하는 완전한 비존재의 '관능'으로 잠들기를, 그래서 바보같은 불멸의 소송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죽음, 불멸없는 죽음은 쿤데라에게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것의 반대는 관념적인 죽음, 시인이 꿈꾸는 위대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뒤로 남긴다는 사실에 아녜스는 질색하고 로라는 매달린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 아녜스는 폴이 그녀에게 다가오기 전에 더 빨리 죽기를 소망한다. 반대로 로라는 연인의 별장에서 죽기로, 자신의 육체를 연인에게 온전히 바치고 가기를 소망한다. 카프카는 자신의 모든 글을 불태우라고 유언하고 미테랑은 홀로(그러나 역사와 함께) 팡테온을 순례한다. 내 생각으로는 밀란 쿤데라가 옹호하는 지점은 철저하게 전자이다. <호모 센티멘탈리스>에서 쿤데라가 비판하는 지점은 기독교 유럽은 '사랑'을 통해 자아의 소유권을 효과적으로 침해하는 방식을 발전시켜왔다는 것이다. 개인의 사랑과 감정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이해되고 준수되어야할 것들을 어기는 유죄를 너무나 쉽게 무죄로 만든다.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숭고한 감정에 고양된 사람들은 원을 그리고 날아오른다. 쿤데라가 고발하는 전체주의의 방식은 이렇게 원을 그리고 날아오르며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가리시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라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베티나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것인 무언가를 뺏고 소유하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이런저런 이름으로 타인을 재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편하게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은 사랑의 이름으로 벌어지곤 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사랑, 민중에 대한 사랑, 질서에 대한 사랑 등등…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쉽게 재단하는 것이 부정의하다는 지점을 지적한다. 왜 프롤레타리아와 애국자들을 사랑하고 예술에 정통한 베티나야말로 괴테의 사랑에 어울리고 실제로는 자신이 프롤레타리아였고 누구보다도 괴테에게 충실했던(특히 육체적으로) 크리스티아네는 역사에서 이름을 남기지 못할까. 그것이야말로 폭력이며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을 (강변하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은 물론 아니다) 『불멸』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읽으니 소설을 팸플릿 읽듯 읽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불멸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1-11-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쿤데라 전집 07 불멸소설 속의 소설이요 가장 슬프고 에로틱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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