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 1

저자
오르한 파묵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0-05-3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거울 앞에 있는 작은 선반에서 퓌순의 립스틱을 보았다. 그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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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박물관』을 읽었다. 사실 소설을 읽는 내 마음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이 소설의 아웃라인을 미리 살펴보지 않고 읽기 시작한다면 한 여자에 대한 다소 이상한 집착을 가진 케말이라는 부르주아 청년의 넋두리를 봐주기도 힘들고, 또 이게 어디로 흘러가나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무엇보다도 문제는 난 주인공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실 '주인공처럼' 사랑하고 집착할 수 있다면 그건 다소 이상하지 않을까? 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21세기를 사는 가난뱅이 대학원생이 1970-80년대 터키의 사랑이야기를 사랑이야기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은 인정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보다가 책을 덮었다가 보다가 세부적인 심리묘사에선 버티지 못하고 후딱후딱 넘긴 적도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세부들로 인해서 파묵이 소설을 통해 의도했던 아이디어가 실패했다고 보기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디어는 무엇일까? 책의 말미를 보면,


 마치카에 있는 제이다의 집에서 나와, 밤의 정적 속에서 케말 씨와 함께 니샨타쉬를 향해 걸었습니다.
 "당신을 파묵 아파트까지 바래다 드리지요. 나는 오늘 밤 박물관이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테쉬비키예의 집에서 머물 겁니다."
 케말 씨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파묵 아파트에서 다섯 건물 떨어진 곳에 있는 멜하메트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 그는 멈춰 서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오르한 씨, 당신의 소설 『눈』을 다 읽었습니다. 나는 정치는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미안합니다만, 읽는 데 좀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말 부분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도 그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소설 끝에서 독자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내게 그런 권리가 있을까요? 언제 책을 마무리할 겁니까?"
 "당신이 박물관을 완성한 후에요." 
 이제 우리 사이에 농담처럼 된 말이었습니다.
 "나는 그 인물처럼, 멀리 있는 독자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반대로, 우리 박물관을 둘러본 사람들은, 그리고 당신 책을 읽은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할겁니다. 하지만 다른 할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주머니에서 퓌순의 사진을 꺼내 멜하메트 아파트 앞에 있는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퓌순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도 그의 곁으로 갔습니다.
 "아름답지 않나요?"
 삼십 년쯤 전에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남자는, 9번이라고 새겨진 검은 수영복을 입고 있는 퓌순의 사진을, 벌꿀 색 팔을, 전혀 즐겁지 않고 오히려 슬픈 얼굴을, 멋진 몸을, 사진을 찍은 후 정확히 삼십사 년이 흐른 후에도 우리를 매료하는 인간적인 고뇌가 묻어 있는 표정을, 그녀의 영혼을, 감탄하며 사랑을 다해 존경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케말 씨, 이 사진을 박물관에 전시하세요."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에 나오는 나의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오르한 씨, 잊지 말아 주세요."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퓌순의 사진에 사랑을 다해 입을 맞추고는, 재킷의 가슴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승리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이 구절이 나는 가장 명료하면서도 핵심적인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케말과 퓌순의 사랑이야기에 대해선 내가 다소 냉랭하다는 점은 안타깝지만.. 케말의 이상한 사랑은 내가 이상하다고 이야기해도, 혹은 다른 누가 뭐라고 이야기한다고 해도 케말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었으리라. 그래서 '이상함'과 비례해서 사랑에 대한 기억(혹은 묘사)은 극도로 디테일해질 수 밖에 없다. 읽는 내가 견딜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부르디외와 인류학에 대한 파묵의 관심이 디테일에 대한 추구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망각되어가고 이해받지 못한 것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그것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고,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궁극적으로는 그것들을 생생하게 전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순수박물관'은 작중 화자인 '케말'이 상징하는 잊혀져가고 이해받지 못 하는, 지금은 낡아버린 어떤 맥락으로 하여금 다시 목소리를 내고 의미를 복권하는 공간이다. 생각해보라, 국가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 대립하는 터키에서, 서구화와 신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개인 모두들은 자기만의 박물관을 가지고 있다. 박물관에 놓인 사물들은 외면과 내면이 교차하는 지점이면서, 또한 우리 각자의 주관들이 이야기를 통해 상호소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사물은 회상이라는 형태로, 또는 기대와 예측이라는 형태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의미가 동화된다거나 무반성적인 공감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케말의 박물관을 보고, 그리고 나의 박물관을 보고 우리는 말하고 떠들 수 있다. 케말이 누누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박물관에는 존중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순 없다.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으려면 박물관 역시 필요하지 않으리라. 박물관은 반드시 기꺼이 보고자 하는 관람객과 관람객의 생각, 그리고 그들의 코멘트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런 아이디어에는 공감을 해도, 사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케말이라는 전시품이다. 이 지점에서 오르한 파묵은 전혀 케말에 대해서 양보해야할 의무도 그리고 의향도 없겠지만, 여튼 나에겐 그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사회적인 목소리가 결여되어있다거나 찌질하다거나 그런 문제보다는, 케말의 모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나열한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꼭 이해해야할 필요는 없기 때문인 것 같다. 파묵은 자연주의자인가? 혹은 케말의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위치와는 상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인가. 이 부분은 조금 헷갈린다. 그래서 나는 파묵의 다른 소설들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이 소설을 좋아할 순 없을 것 같다. 



뭔가 써야할 떄면 늘 그것과는 관련없는 글이 읽고 싶은 법이다. 

학부시절부터 정말 재밌고 흥미로운 글들은 항상 시험기간에 만났던 기억이 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지향점은 개개인들의 내러티브를 이론으로는 보존할 수 없고 내러티브들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 필요하다는 지점인데, 그를 위해서는 내러티브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내러티브와 이론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소설은 이론과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이 작업에 영감을 준 책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이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유럽 소설에 대한 큰 그림은 거진 다 밀란 쿤데라의 것을 본뜬 것이다. <소설의 기술>에서 내가 감명받았던 부분은 소설은 이론과는 다른 인식을 제공하는데, 그건 어떤 다른 전통으로는 보존할 수 없는 성질의 진리라는 주장이다. 이를테면 권태나 지루함, 모멸감, 혹은 철학에서 다루는 시간과 공간의 문제들, 혹은 사회이론에서 다루고 있는 현대성의 문제들에 대해서 소설만이 밝혀줄 수 있는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소설은 단지 철학이나 과학이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는 장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철학이나 과학이 다루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잘, 혹은 더 잘 다룰 수 있다. 로티가 밀란 쿤데라를 지지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인데, "Heidegger, Kundera, and Dickens"라는 논문에서 그는 하이데거가 그토록 극복하고자 했던 형이상학과 유럽(대문자 Europe)의 모순점을 내러티브(쿤데라는 이런 표현을 싫어할지도 모르겠다)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쿤데라와 로티의 주장에 따른다면, 유럽에는 철학과 과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훌륭한 전통이 남아있는 것이다. 



소설과 소설가

저자
오르한 파묵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09-14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파묵 씨, 당신은 이런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스탕달에서 도스...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오르한 파묵의 대학강연집인 <소설과 소설가>는 원제가 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인데 굉장한 의역이면서도, 또 달리 생각해봐도 핵심주제는 소설과 소설가의 관계라 참 번역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소설의 기술>처럼 테크닉을 알려주는 책으로 오해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건 알려드리고 싶다. 생각해보면 <내 이름은 빨강>같은 소설이나 <검은 책>등을 봐도 오르한 파묵이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은 자신이 그린 그림과 자신의 관계였다. 파묵은 실러를 인용하면서 소박성과 성찰성을 양측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독서에 있어서, 그리고 소설에 있어서 소박성과 성찰성은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 힘든 관계임은 분명하다. 소설을 읽는다는 지점은 작가의 이야기 안에 발을 담근다는 점을 의미하고, 이 세계는 비록 상징적이지만 분명히 어떤 실재에 맞닿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분명 문장들 사이에 위치하고 우리가 어느 정도 이 세계로부터 이격하지 않으면 그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하다. 따라서 이 둘의 접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데, 파묵은 구체적이지만 다소 지리하게 경험을 통해 논증하고 있어 나는 이 부분을 구성주의적인 독자의 입장에서 '구성적 실재'를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파묵씨의 실용적인 답변이 나는 마음에 들고 지지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 싶다.



 나는 여기서 소설 쓰기와 읽기가 주는 즐거움이 두 부류의 독자들에 의해 완전히 망쳐진다는 것을 덧붙입니다.

1. 전적으로 '소박한' 독자들: 이 사람들 손에 들린 책이 소설이라고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은 텍스트를 작가의 자서전 또는 경험담을 약간 고친 연대기라고 생각합니다.

2. 전적으로 '성찰적' 독자들: 이 사람들 손에 들린 책이 작가의 가장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바탕으로 했다고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을 모든 텍스트가 철저한 계산 아래 만들어진 허구라고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런 사람들을 절대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소설 읽는 즐거움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 구성적 실재가 어떻게 다시 현실과 연관을 맺게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쓸모있는 예시인 것 같다. 파묵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관계를 파고들고자 한다. 하나는 언어가 어떻게 영혼에 감각적인 인상을 가져오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이 어떻게 소설적인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느냐이다.

 첫번째 측면은 주로 소설의 창작에 관련되어 있다. 파묵에 따르면 소설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인상의 표현이다(거칠게 말하면). 그에 따르면 소설가에게는 화가와 비슷한 충동이 내재되어 있어서 그가 '본' 것을 그려내고 싶은데, 화가가 그것을 선과 색채로 한다면 소설가는 단어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경우 소설가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을 조금 더 보완하고 싶은데, 인상을 궁극적으로 시각이라고 제한하는 건 파묵이 인식철학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괴테를 회화적인 재능보다 단어에 대한 재능이 앞선다고 이야기하는 지점을 생각해보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사전적으로 제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차라리 이 지점에서는 쿤데라 식으로 작가는 형식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두번째 측면으로 파묵이 보여주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소설을 향유하고 즐기고, 무엇보다도 참여하느냐라는 문제이다. 파묵이 좋아하는 말처럼 소설은 소설가가 가지는 하나의 박물관일 수 있다. 박물관에 무엇을 모아두든 그것은 소설가의 전적인 자유에 속할 것이지만, 또 소설가는 아무래도 낮에 입장한 독자들의 입담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시점에서 박물관은 오롯이 소설가의 것만은 아니게 된다. 재밌게도 파묵은 이 지점에서 부르디외를 인용하고 있는데(아마 부르디외의 성찰성 논의를 읽었다면 더 흥미로웠을게다) 분명 어느 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성취이며 여기에는 보상이 있다. "어떤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은 작가의 의도나 독자들의 반응을 파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텍스트 속 지식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고 텍스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내는 데 있습니다." 라는 식의 기준을 충족한 독자들은 적어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너, 오르한 파묵 읽어봤어?" 이 부분에서 파묵은 쿤데라보다는 훨씬 독자친화적인데, 쿤데라라면 작가의 박물관에 대해 세르반테스를 빌어서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토마시는 나의 것"이라고. 


뭐 재미있는 책이었다. 라고 마무리하기엔 조금 짧게 쓰는 거 같은데, 사실 파묵의 강연 자체가 뭔가 결론을 주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이론적인 문제점을 강하게 빵 찔러놓고 경험적인 영역에서 이런 측면도 있고 저런 측면도 있는 거 같다.. 좀 이런 식인 거 같아서. 물론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라는 독자에게는 각별하게 느껴진다. 이런 부분은 정말 좋았다. 아니 아, 쓰고 나니까 이 부분을 넘어가면 안 될 거 같다. 


 하지만 내가 이제 자세히 설명할 박물관 같은 특성이 있는 소설들은 생각을 일깨우기보다는 간직하고 보존하며 잊히는 것에 저항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이게 내러티븐데!!!). 마치 서양에서 가족들이 일요일에 박물관에 가서 자신의 과거 가운데 일부가 잘 보존된 것을 보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처럼, 소설 독자들도 책장을 넘기다 실제 버스를 탔던 정거장, 읽었던 신문, 좋아하는 영화, 창밖으로 보았던 저녁노을, 마셨던 사이다, 보았던 포스터와 광고, 걸었던 골목과 거리와 광장─<검은 책>을 발표한 후 독자들이 소설에 나온 거리를 걷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들어갔던 상점(알라딘의 가게 같은), 입었던 옷과 마주할 때 커다란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 행복감의 한 원인은, 우리가 박물관에서 느끼는 어떤 착각과 비슷합니다. 이는 역사가 공허하고 무의미하지만은 않으며,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는 간직될 거라는 느낌과 자긍심입니다. 진정한 문학과 소설의 불멸성에 관해 널리 퍼진 공허한 믿음들도 이 자긍심과 위로를 뒷받침해 줍니다. …
 많은 소설가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바로 내가 본 것들을 보고, 느낀 것들을 느꼈군요. 마치 내 인생을 쓴 것 같아요." 이 호의적인 말에 기뻐해야 할지 속상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무에서 상상력만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창조적인 소설가가 아
니라, 어떤 공동체에서 모두 함께 공유하는 어떤 삶을 기록하는 역사가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하이데거와 쿤데라, 그리고 디킨즈에 대한 로티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상상으로 시작된다. 만약 서양이 버섯구름과 함께 멸망하고 100년이 지난 뒤에 인도와 한국의 독자들은 Europe을 어떻게 기억할까? 로티는 철학적인 결론으로 소설을 이야기하는데, 어떤가. 이게 좀 설득력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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