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2010.03.01

나는 오늘 하루가 시간상으로 어제와 분리되는 시점에 당신의 도시에 있었다.
은희경 소설 말미에 나오는 것처럼, 혹은 김승옥이 무진을 떠나면서 느낀 것처럼
나는 당신과의 거리를 쟀다. 몇km의 거리가 쉬이 지나갔고 나는 그 '멀어짐'을 느끼기 위해 엑셀을 때려밟았고
곱게곱게 안산시내를 돌아다니던 작은 모닝은 거친 숨을 쥐어짰다.
모닝이라, 실로 밤에 사랑의 상처에 빠진 남자와는 굉장히 안 어울리는 차종아닌가.

집에 와서는 스러져서 잠이 들었다. 한 12시까지 잠들려고 했는데 아침이 되자 동생이 잠을 깨웠다.
그렇군, 집에 오랜만에 왔으니 몇가지 의무가 나에게 넘어온 셈이다.
군말없이 일어나서 동생을 알바하는 곳에 태워주고 돌아온다.
동생을 내려주고 93.1을 듣는다.
마침 나온 음악이 스메타나, "나의 조국"-몰다우.
나는 그제서야 오늘이 3.1절임을 깨닫는다.


어렸을 적엔 3.1절은 신성한 의미를 지녔었다.
그땐 민주화 세력이나 권위주의 세력이나 모두 민족을 등에 업으려 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신성한 권위, 대한민국의 뿌리라는 사실은 의심받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요새는 한 정권, 한 시대의 정당성을 단지 '능률'과 '돈'이라는 측면에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고개들고 있어서
식민시대의 경제개발이 수치상으로 어쩌니,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건국했느니(차라리 미국이 건국했다고 하지),
뭐 그딴 얘기를 하면서 한국민족을 현재의 기득권에 길들이고 짜맞추려고 하는 것 같아 조금 슬프다.
나는 민족의 실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는 입장이지만 그만큼 민족의 개념은 노력하면 어떤 의미로든,
악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과 역사적으로 입증된 실례가 있기 때문에
뉴라이트들, 그리고 그에 부화뇌동하는 몇몇 짭퉁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그들 뒤의 부끄러운 무리들의
시도가 미치는 해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공화국에 필요한 것은 굴종과 순응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이다.
그네들의 시도는 당장 그들의 이익에 부합할 지 몰라도 장기적인 시점에선 이 공화국의 미래를 망쳐버릴 것이다.

1919년 3월 1일은 엘리트들과 대중들의 차이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엘리트들이 이상을 외치며 아주 현실적으로 발을 뺀 것에 비해, 그리고 아주 쉽게 포기한 것에 비해
대중은 그 힘이 일제에 의해 소진되어버릴 때까지 당당히 맞서 싸웠다.
일제가 강압적인 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정치엘리트들을 구워삶을 계획을 세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우리 엘리트들은 비겁했지만 우리 민초들은 역사 앞에 당당하다.
그래서 33인의 선언자들이 3.1절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일개 학생운동가였던, 작은 여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가 3.1절은 대표하는 것이다.
유관순 열사는 집시법 위반자가 아니라, 불순분자가 아니라 3.1절의 아이콘인 셈이다.

최근 3.1절과 유관순 열사를 역사책에서 축소 혹은 삭제하려 한다는 보도를 접하고
심히 우려가 들어 남기는 글이다.


나는 아직 많이 문약하고
그저 스메타나, 시벨리우스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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