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뉴욕....이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내게 많은 인식을 미치고 있었을까. 실은 인도에 대한 인상조차도 BRICs라는 '요즘 좀 잘 나가는 나라들'의 한 부분으로 아주 피상적이었음을 뭄바이에서 깨닫게 된다. 그 뒤로 인도에서 어떤 산업이나 발전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린 것 같다. 나는 지극히 한국적으로 개발중인 한국의 신도시나 상하이를 생각한 게 분명했다. 처음 뭄바이의 인상은 실망 그 자체였다. 습하고 무더운 공기, 우중충한 조명, 더러운 화장실, 요상한 물맛, 몸을 뉘기에는 빡센 벤치, 익히 들어오던 소매치기에 대한 두려움, 뭄바이 국제공항은 긴 여행에 지친 우리앞에 이제 여행은 시작일 뿐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여차여차해서 택시는 공항을 나왔고, 우리는 인도의 쾌쾌한 새벽공기를 맡으며 길을 나섰다. 길에는 뭔가 천더미들이 널려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은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자는 노숙소년에게 물을 끼얹는 장면을 목격하고 굉장히 기겁했다.
또한 아무렇게나 무단횡단을 하는 장면(실은 인도에서 신호를 지킨다는 것 자체가 상식이 아닌 것 같다.),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버리는 장면(그러나 나 역시 나중에는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버렸다는 사실, 반성한다),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던 갖가지 구걸행위들(애들은 물론이요, 갓난애 안은 소녀들, 노인들, 기타등등..),
그리고 길거리의 즘생들.
인도에서의 쇼킹했던 장면들은 모두 뭄바이에서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우리는 표를 구하고 아우랑가바드로 떠나는 열차시간인 11시까지 뭄바이를 돌아다니기로 결정했다. 이하는 돌아다닌 사진들.
실은 그냥 일반생활에서도 미간에 빨간 점을 찍는다는 거, 우리 사회에선 불가능한 일 아닌가.
나는 이렇게 적었다.
"인도의 시내 철도를 이용하여 '도비 가트'를 다녀왔다. 잠시 봤지만 뒤이어 들이닥친 유럽 방문객들 때문에 약간은 슬퍼졌다. 자유인으로 태어난 그들은 같은 슬픔을 느낄까. 사진기를 들이댔을 때 그들의 비참한 지위를 이용해 내게 구걸을 시도한 도비가트의 아이들 때문에 더더욱 슬퍼졌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철도에서 만난 7살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가 갓난 아이를 업고 있었다;)에게 동전대신 덥썩 연필 두 자루를 쥐어주었다. 그 아이는 이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내게 설명을 요구했고 나는 이것이 무언가를 적는데 사용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그리고 헛되보이는 꿈을 그려주었다.)
나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영국의 영화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곳."
"인도문을 관람. 처음 보는 아라비아해. 물이 그리 맑진 않다."
그야말로 빠글빠글하다. 아무데서나 잘 눕고 아무데서나 잘 이야기하고 아무하고나 잘 웃는 사람들.
그땐 정말 덥고 사람들 적응이 안 되어서 힘들었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뭄바이는 참 멋진 곳이었다. 단 한나절만 놀고 와서 좋은 기억만 남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인도의 대도시들은 정말 힘들기만 할 뿐이었고 뭄바이처럼 고풍스럽고 멋지고 깨끗한 대도시는 본 기억이 없다. 아마 미련이 남아서겠지만....
첫날 나는 이렇게 적었다.
"마음이 괴로운 내게 인도는 웃음을 주었다. 어이없게도 귀지로 내게 사기를 치려 했던 엉터리 사기꾼, 앉아서 수다를 떨던 할머니들, 호객꾼들, 말도 안 되게 이쁜 길들, 바람, 인정, 그 찌를듯한 눈빛들, 요상한 당당함, 묘한 향기. 이 땅을 사랑하게 될까?"
아마 그 때 나는 벌써 사랑에 빠지고 있었나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아우랑가바드행 SL열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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