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롭지 않은 포스팅, 그러나 오랜만의 포스팅을 해야겠다. 

단문들이지만, 사실 단문 정도면 내 시시한 일상에는 충분한 의미부여가 가능하리라. 

우선, 아주 오랜만에 중앙도서관을 갔다.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다, 갈증을 채웠다. 

되게 쑥스러운 일인데, 난 울학교에 안나 "카레리나"를 검색해보고 아, 어떻게 학교 도서관에 안나 카레리나도 없을까 개탄스러워하며 안나 카레니나를 신청한 적이 있다. 

물론 여러분은 안나 카레리나가 아닌 카레니나만 쳐도 수두룩하게 나오는 목록들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여튼 그리하여 최신 번역판을 내가 신청한 바 있는데, 정작 그 신청한 책을 내가 빌리진 못 했고 방학이 된 지금 안나 카레니나 1권을 빌리기는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문과 학생 누구든 방학이 되면 뭔가 고전이든 소설이든, 아니면 고전소설이든 자기가 읽지 못 했던 어떤 책이 읽고 싶은 게 당연하니까.

그러나 안산 중앙도서관에 가면 그런 걱정은 덜어도 된다.


내가 아주 단순하게 잡은 안나 카레니나의 골조는 레빈과 키티의 순결한 사랑, 그리고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같은 사랑이라는 두 축이 교차되는 십자가이다.

무엇보다도 굉장히 신선하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역에서 만나는 장면이었다. 

하필이면 왜 역이었을까. 안나의 "예감"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촌스럽지 않고 너무나도 근사하고, 두근거렸다. 

안나가 브론스키를 보고 "하필이면"이라고 생각했던 것, 브론스키가 안나를 따라갔던 것, 그리고 그 이후의 전개들 모두다 단지 개연성있고 낭만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바로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해보자.

우선 내게 안나 카레니나를 소개해준 사람은 밀란 쿤데라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에서 소설적인 '인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철학이나 사회학이 아닌 오직 소설만이 밝혀줄 수 있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밝힌다'라는 말을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사용하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앎은 불, 혹은 빛으로 표현된다. 안나 카레니나와 레빈의 '빛'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을 보도록 하자.


(안나 카레니나가 기차에 올라타 소설을 읽는 장면 추가할 것)

그것은 가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기에게 삶과 인간관계의 의미를 드러내준 그 날카로운 빛 속에서 그 점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
'불가능해! 삶이 우리를 가르는 거야. 나는 그를 불행하게 만들고, 그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야. 그 사람이나 나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해.... "
… 그녀는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을 혐오스럽게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선명함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았으며, 그 선명함은 그녀를 기쁘게 했다. 
… '그래, 내가 어디에서 멈췄지? 인생이 고통이 아닐 수도 있는 상황을 생각할 수 없고, 우리 모두 고통을 겪기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을 기만하기 위한 수단을 고안하고 있다는 것에서 멈췄지. 하지만 진실을 안다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자기가 브론스키와 처음 만나던 날 기차에 치어 죽은 사람을 상기하고 지금 무어을 해야 할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급수탑에서 레일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빠르고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가 자기 옆을 지나가는 기차에 바짝 다가가 멈춰 섰다. 그녀는 객차의 아랫 부분, 나사와 연결부 그리고 천천히 구르고 있는 첫 번째 객차의 커다란 쇠바퀴를 보며 눈어림으로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의 중간 지점과 그 중간 지점이 자기 앞에 오는 순간을 재보려고 노력했다. 
'저기로!' 하고 그녀는 객차의 그림자와 침목 위에 흩뿌려진 석탄과 뒤섞인 모래를 응시하면서 중얼거렸다. '저기로, 바로 저 한가운데로, 그렇게 나는 그를 벌하고 모든 사람과 나로부터 벗어나는 거야.' 
 그녀는 한가운데가 자기와 나란히 된 첫째 차량으로 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손에서 내려놓으려 한 빨간 여행 가방이 그녀를 방해하여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중간 부분이 그녀를 지나갔다. 그래서 다음 차량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녀는 수영하려고 물속에 준비할 때 느꼈던 것과 유사한 감정에 사로잡혀 성호를 그었다. 성호를 긋는 익숙한 동작이 그녀의 마음속에 어린 시절과 처녀 시절의 갖가지 기억들을 불러냈고, 갑자기 그녀의 모든 것을 덮고 있던 어둠이 찢어졌다. 그리고 일순간 그때까지의 삶이 온갖 밝은 과거의 기쁨에 감싸여 그녀 눈앞에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가오는 두 번째 차량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바퀴와 바퀴 사이 한가운데가 그녀 앞에 이른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빨간 여행가방을 내던지고 머리를 어깨 사이로 움츠리고 양손을 짚고 차량 밑에 쓰러졌다. 그리고 가벼운 동작으로 마치 이내 일어날 준비를 하듯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기가 한 일에 전율했다. '내가 어디 있는 거야?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도대체 왜?' 그녀는 일어나 몸을 젖히고 싶었다. 그러나 무언가 거대한 것이 가차 없이 그녀의 머리를 치고 등을 끌고 갔다. '신이시여. 저의 모든 것을 용서해주세요!' 그녀는 저항이 불가능함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노인이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며 철로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불안, 기만, 괴로움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던 한 자루의 촛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밝게 타올라, 그녀에게 지금까지 어둠 속에 놓여 있던 모든 것을 비춰주다가 바지직거리며 어두워지더니 영원히 꺼져버렸다. 


톨스토이가 불안, 기만, 괴로움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이라 말한 것은 안나가 기차에서 소설을 읽는 장면과 쌍을 이룬다. 안나는 자신의 삶이라는 소설을 읽고 그 주인공을 되고 우리는 안나의 연구를 지켜본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는 레빈의 탐구 역시도 나타난다. 톨스토이가 명시하는 것처럼 레빈은 형의 죽음과 아들의 탄생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콘스탄틴 드미트리치, 미튜하(농부는 가옥 관리인을 경멸적으로 그렇게 불렀다)가 어떻게 이득을 안 볼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어떻게든 쥐어짜서 자기 몫을 챙기니까요. 그는 기독교 신자를 봐주지 않을 거예요. 포카니치 아저씨(그는 플라톤 노인을 그렇게 불렀다)는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짓은 하지 않아요. 그는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빚을 탕감해주기도 하지요. 그는 아무도 착취하지 않아요. 똑같은 사람이니까요." 
"그럼 무엇 때문에 그는 빚을 탕감해주지?"
"그거야, 사람도 여러 종류니까요. 미튜하처럼 자기 필요만을 위해 살고 자기 이속만 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포카니치처럼 정직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는 영혼을 위해 삽니다. 신의 뜻을 이해하는 거지요." 
"어떻게 신을 이해하지? 영혼을 위해 사는 게 어떤 거야?" 레빈은 거의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라니요? 뻔하지요, 신의 따라서죠 하지만 사람들은 가지가지입니다. 당신을 보면, 남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으시잖아요." 
"그래, 그렇지, 잘 가게!" 레빈은 흥분한 나머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자마자 지팡이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쁨이 레빈을 휩싸고 있었다. 포카니치가 신의 뜻에 따라 영혼을 위해 산다는 농민의 말을 듣자, 불분명하지만 의미심장한 생각이 지금까지 어딘가 닫혀 있던 데서 떼를 지어 뛰쳐나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그 자체의 빛으로 그를 눈멀게 하면서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감정은 내가 꿈꾸었던 것처럼 갑자기 나를 변화시키지도, 행복하게 해주지도, 밝게 비춰준 것도 아니다. 마치 아들에 대한 감정과도 같다. 또한 그 어떤 뜻밖의 선물도 아니다. 이것이 신앙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감정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내 영혼에 고통과 함께 들어와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반에게 화를 낼 것이고, 논쟁도 벌일 것이며, 마땅치 않은 때 내 의견을 표현할 것이다. 여전히 나의 가장 성스러운 영혼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심지어 내 아내와의 사에에도 벽이 존재할 것이며, 내가 느끼는 공포를 가지고 아내를 비난하고 그 때문에 후회를 할 것이다. 나는 또 여전히 왜 내가 기도하는지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해도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의 삶은, 나의 삶 전체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에 구애받음이 없이 매 순간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내 삶 속에 부여할 수 있는 선의 의의를 지니게 될 것이다!' 


 나는 이들의 탐구를 단순히 톨스토이의 탐구로 등치시키고 싶지는 않다. 물론 이 소설을 쓴 사람은 톨스토이다. 하지만 안나와 레빈 모두 충분히 살아숨쉬고 있지 않은가.. 너무 단정짓는 것같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밀란 쿤데라가 이야기하는 소설의 인식을 빛의 형이상학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궁극적으로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의 인생에서 아직 빛을 비추지 못했던 어두운 부분의 것이다. 그러나 빛은 찰나적이고 안나와 레빈은 그것에 대한 인상을 이해하고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그들은 행동한다. 안나는 온통 악과 가식으로 가득찬 세계를 발견했으며 그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쳤고, 레빈은 삶의 의미를 종교적인 사유와 휴머니스틱한 행위로 형성시켜나가고자 한다. 

한편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인식의 측면에서 대조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다못해 지식인인 세르게이조차도 그가 볼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 브론스키는 말할 것 없고, 오블론스키는 그 가능성을 탐구하지 않는다.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소설 내에선 비성찰적인 군상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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