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존재하는가.

십자군전쟁에 참여해 10년을 종군하고 돌아온 스웨덴의 기사 안토니우스 블록은 그를 데려가려는 죽음의 방문을 받는다. 안토니우스 블록은 호기롭게 죽음에게 이기면 자신을 놓아주는 조건으로 체스게임을 제안하고 죽음은 이를 승낙한다. 기사는 유예기간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가 돌아온 스웨덴은 흑사병으로 인해 죽음이 그야말로 춤을 추고 있었다. 교회에서 죽음에 관련된 그림을 그리던 화가는 이렇게 말한다. "발가벗은 여자보다는 죽음이 더 흥미를 끌겁니다." 죽음은 도처에 널려있고 안토니우스 블록도 자신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직감한다. 그래서 더더욱 그는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한다.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니까. 그의 종자가 계속 이야기하는 '무의미'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셈이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기사는 응답받지 못 한다. 그의 문제를 가장 확실히 해결해줄 수 있었던 신은 어디에선가 숨어서  대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비참할 뿐이고 악마를 알고 있다던 마녀는 죽음 앞에서 똑같이 고통받는 인간임을 보일 뿐이다. 그리고 죽음은, 몹시나 의뭉스럽다. 죽음은 아무 비밀도 숨기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설정이 다소 과도한 것 같지만, 철학적인 문제를 아주 뚝심있게 풀어낸 영화(잔재미도 없지 않음). 결국 잉그리드 베리만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인간조건 아래서 인간답게 살아야한다는 것 아닐까. 삶의 이유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영화를 통해 볼 때 그것은 모르는 것으로 알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는 실수와 다를바 없어 보인다. 기사는 미지의 영역을 빌어 현실을 깨닫고자 했지만 결국 그가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의미'는 행복 비스무리한 것일 뿐이었다. 그가 직접 보고 느꼈던 그 짧은 행복.

영화에 완전히 동의하진 않는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현실의 행복에 만족하는 순박한 사람들이란 게 그것이 삶의 의미라고 감독도 주장하고 있지는 않는듯 싶다. 그네들은 과연 죽음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또한 기사의 고민은 결국 그의 날에는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무가치한 것일까? 혹은 그런 고민이야말로 모든 인간들이 느끼는 '그저 호기심'은 아닐까.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을 이렇게 고쳐써본다. 인생은 의미있는 것인가.
의미있다면 어떻게 의미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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