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써야할 떄면 늘 그것과는 관련없는 글이 읽고 싶은 법이다. 

학부시절부터 정말 재밌고 흥미로운 글들은 항상 시험기간에 만났던 기억이 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지향점은 개개인들의 내러티브를 이론으로는 보존할 수 없고 내러티브들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 필요하다는 지점인데, 그를 위해서는 내러티브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내러티브와 이론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소설은 이론과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이 작업에 영감을 준 책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이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유럽 소설에 대한 큰 그림은 거진 다 밀란 쿤데라의 것을 본뜬 것이다. <소설의 기술>에서 내가 감명받았던 부분은 소설은 이론과는 다른 인식을 제공하는데, 그건 어떤 다른 전통으로는 보존할 수 없는 성질의 진리라는 주장이다. 이를테면 권태나 지루함, 모멸감, 혹은 철학에서 다루는 시간과 공간의 문제들, 혹은 사회이론에서 다루고 있는 현대성의 문제들에 대해서 소설만이 밝혀줄 수 있는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소설은 단지 철학이나 과학이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는 장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철학이나 과학이 다루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잘, 혹은 더 잘 다룰 수 있다. 로티가 밀란 쿤데라를 지지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인데, "Heidegger, Kundera, and Dickens"라는 논문에서 그는 하이데거가 그토록 극복하고자 했던 형이상학과 유럽(대문자 Europe)의 모순점을 내러티브(쿤데라는 이런 표현을 싫어할지도 모르겠다)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쿤데라와 로티의 주장에 따른다면, 유럽에는 철학과 과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훌륭한 전통이 남아있는 것이다. 



소설과 소설가

저자
오르한 파묵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09-14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파묵 씨, 당신은 이런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스탕달에서 도스...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오르한 파묵의 대학강연집인 <소설과 소설가>는 원제가 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인데 굉장한 의역이면서도, 또 달리 생각해봐도 핵심주제는 소설과 소설가의 관계라 참 번역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소설의 기술>처럼 테크닉을 알려주는 책으로 오해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건 알려드리고 싶다. 생각해보면 <내 이름은 빨강>같은 소설이나 <검은 책>등을 봐도 오르한 파묵이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은 자신이 그린 그림과 자신의 관계였다. 파묵은 실러를 인용하면서 소박성과 성찰성을 양측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독서에 있어서, 그리고 소설에 있어서 소박성과 성찰성은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 힘든 관계임은 분명하다. 소설을 읽는다는 지점은 작가의 이야기 안에 발을 담근다는 점을 의미하고, 이 세계는 비록 상징적이지만 분명히 어떤 실재에 맞닿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분명 문장들 사이에 위치하고 우리가 어느 정도 이 세계로부터 이격하지 않으면 그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하다. 따라서 이 둘의 접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데, 파묵은 구체적이지만 다소 지리하게 경험을 통해 논증하고 있어 나는 이 부분을 구성주의적인 독자의 입장에서 '구성적 실재'를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파묵씨의 실용적인 답변이 나는 마음에 들고 지지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 싶다.



 나는 여기서 소설 쓰기와 읽기가 주는 즐거움이 두 부류의 독자들에 의해 완전히 망쳐진다는 것을 덧붙입니다.

1. 전적으로 '소박한' 독자들: 이 사람들 손에 들린 책이 소설이라고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은 텍스트를 작가의 자서전 또는 경험담을 약간 고친 연대기라고 생각합니다.

2. 전적으로 '성찰적' 독자들: 이 사람들 손에 들린 책이 작가의 가장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바탕으로 했다고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을 모든 텍스트가 철저한 계산 아래 만들어진 허구라고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런 사람들을 절대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소설 읽는 즐거움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 구성적 실재가 어떻게 다시 현실과 연관을 맺게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쓸모있는 예시인 것 같다. 파묵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관계를 파고들고자 한다. 하나는 언어가 어떻게 영혼에 감각적인 인상을 가져오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이 어떻게 소설적인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느냐이다.

 첫번째 측면은 주로 소설의 창작에 관련되어 있다. 파묵에 따르면 소설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인상의 표현이다(거칠게 말하면). 그에 따르면 소설가에게는 화가와 비슷한 충동이 내재되어 있어서 그가 '본' 것을 그려내고 싶은데, 화가가 그것을 선과 색채로 한다면 소설가는 단어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경우 소설가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을 조금 더 보완하고 싶은데, 인상을 궁극적으로 시각이라고 제한하는 건 파묵이 인식철학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괴테를 회화적인 재능보다 단어에 대한 재능이 앞선다고 이야기하는 지점을 생각해보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사전적으로 제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차라리 이 지점에서는 쿤데라 식으로 작가는 형식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두번째 측면으로 파묵이 보여주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소설을 향유하고 즐기고, 무엇보다도 참여하느냐라는 문제이다. 파묵이 좋아하는 말처럼 소설은 소설가가 가지는 하나의 박물관일 수 있다. 박물관에 무엇을 모아두든 그것은 소설가의 전적인 자유에 속할 것이지만, 또 소설가는 아무래도 낮에 입장한 독자들의 입담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시점에서 박물관은 오롯이 소설가의 것만은 아니게 된다. 재밌게도 파묵은 이 지점에서 부르디외를 인용하고 있는데(아마 부르디외의 성찰성 논의를 읽었다면 더 흥미로웠을게다) 분명 어느 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성취이며 여기에는 보상이 있다. "어떤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은 작가의 의도나 독자들의 반응을 파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텍스트 속 지식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고 텍스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내는 데 있습니다." 라는 식의 기준을 충족한 독자들은 적어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너, 오르한 파묵 읽어봤어?" 이 부분에서 파묵은 쿤데라보다는 훨씬 독자친화적인데, 쿤데라라면 작가의 박물관에 대해 세르반테스를 빌어서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토마시는 나의 것"이라고. 


뭐 재미있는 책이었다. 라고 마무리하기엔 조금 짧게 쓰는 거 같은데, 사실 파묵의 강연 자체가 뭔가 결론을 주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이론적인 문제점을 강하게 빵 찔러놓고 경험적인 영역에서 이런 측면도 있고 저런 측면도 있는 거 같다.. 좀 이런 식인 거 같아서. 물론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라는 독자에게는 각별하게 느껴진다. 이런 부분은 정말 좋았다. 아니 아, 쓰고 나니까 이 부분을 넘어가면 안 될 거 같다. 


 하지만 내가 이제 자세히 설명할 박물관 같은 특성이 있는 소설들은 생각을 일깨우기보다는 간직하고 보존하며 잊히는 것에 저항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이게 내러티븐데!!!). 마치 서양에서 가족들이 일요일에 박물관에 가서 자신의 과거 가운데 일부가 잘 보존된 것을 보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처럼, 소설 독자들도 책장을 넘기다 실제 버스를 탔던 정거장, 읽었던 신문, 좋아하는 영화, 창밖으로 보았던 저녁노을, 마셨던 사이다, 보았던 포스터와 광고, 걸었던 골목과 거리와 광장─<검은 책>을 발표한 후 독자들이 소설에 나온 거리를 걷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들어갔던 상점(알라딘의 가게 같은), 입었던 옷과 마주할 때 커다란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 행복감의 한 원인은, 우리가 박물관에서 느끼는 어떤 착각과 비슷합니다. 이는 역사가 공허하고 무의미하지만은 않으며,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는 간직될 거라는 느낌과 자긍심입니다. 진정한 문학과 소설의 불멸성에 관해 널리 퍼진 공허한 믿음들도 이 자긍심과 위로를 뒷받침해 줍니다. …
 많은 소설가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바로 내가 본 것들을 보고, 느낀 것들을 느꼈군요. 마치 내 인생을 쓴 것 같아요." 이 호의적인 말에 기뻐해야 할지 속상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무에서 상상력만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창조적인 소설가가 아
니라, 어떤 공동체에서 모두 함께 공유하는 어떤 삶을 기록하는 역사가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하이데거와 쿤데라, 그리고 디킨즈에 대한 로티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상상으로 시작된다. 만약 서양이 버섯구름과 함께 멸망하고 100년이 지난 뒤에 인도와 한국의 독자들은 Europe을 어떻게 기억할까? 로티는 철학적인 결론으로 소설을 이야기하는데, 어떤가. 이게 좀 설득력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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