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나라도 이렇게 표지만들면 안 될까.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 대해서 리뷰하도록 하자! 


불멸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중에서도 제법 길고 두꺼운 책이다. <농담>이나 <이별의 왈츠>처럼 경쾌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좀 더 무거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과 망각의 책>과 상당히 비슷한 외양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분량이 길다기보다는 여러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있고, 그 이야기들이 중첩되어서 보여주는 색깔이 복잡미묘하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은 쿤데라의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꽤나 어려운 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불멸>이 뭐에 대한 이야기다, 딱딱 이야기할 수 있는 자신은 없다. 그러므로 천천히 여러 이야기들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선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갈등구조인 아녜스-로라의 대칭쌍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소설에서 두 자매는 끊임없이 쫓고 쫓기는 경주를 펼치고 있다. 아녜스는 우스꽝스러운 불멸에 대해서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의 다른 책제목인 <배신당한 유언들>처럼 어떤 개인의 유산은 그가 지상을 떠나는 순간 더이상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혹은 그녀의 유산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 그것이 산 사람의 죽은 이에 대한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아녜스는 그녀의 몸짓을 로라에게 빼앗겼을 때의 불쾌감은 자아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당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자신과 로라의 운명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현대성의 병폐는 자아에 대한 타자의 무자비한 침범과 또 그것이 정당화된다는 점에 있다. K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조차도 타자들은 성실하게 관찰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가. 그래서 아녜스의 아버지는 죽은 아내의 사진을 불태우고, 집을 떠나서 혼자 살기를 원하고, 임종이 다가와서는 아녜스를 그만 보기를 원했다. 아녜스와 그녀의 아버지는 오롯이 기억되기를 원한다. 그 기억은 그 유산을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자들에게만 허용되어야 했다. 그런 이들에게 원하지 않는 불멸, 불멸이라는 소송은 원치 않는 존재의 징벌이다. 



역사와 현실 속에서 항상 이기는 쪽은 미래다. 불멸이란 법정에서 정의는 항상 미래에 있다. 정의란 미래에 속해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해도 될까. 『소설의 기술』에 나오는 것처럼 미래는 과거에 대해 당당하게 권력을 행사한다. 아녜스는 끊임없이 로라를 따돌리고자 노력했지만 끝내는 자신이 따라잡히리라는 사실을 안다. 괴테 역시도 '이 귀찮은 쇠파리(diese leidige Bremse)' 베티나가 끝내는 자신의 유언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괴테와 베티나는 이 소설의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대립쌍이다. 영민한 베티나는 불멸을 향해 걸어가는 괴테의 모습을 보았고 내 생각으로는 그 불멸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베티나는 괴테에게 어린아이로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무릎에 앉는 베티나에게 괴테는 매혹되었지만 곧 괴테는 베티나의 관심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베티나가 그에게 편지로 전한 말 "나에겐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리라는 굳고 견고한 의지가 있답니다."라는 문구에서 베티나의 관건은 '영원히'와 '의지'였던 것이다. 베티나는 괴테에 대한 책을 쓰기를 원했고, 괴테의 편지를 출간하기를 원했고, 괴테의 연인으로 기억되고 싶어했다. 그녀에게 괴테의 다른 부분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세계의 다른 여러 부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베티나와 로라는 그래서 무언가를 얻어낼 때의 몸짓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금 당신들이 하는 말에 난 흥미 없어요. 난 회계사가 아녜요. 나란, 바로 이런 인간이에요!" 라고 대답하며 그녀는 손가락 끝을 가슴에, 정확히 두 젖가슴 사이에 얹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가볍게 뒤로 젖히고 얼굴을 미소로 가린 채 두 팔을 갑작스럽게, 그러면서도 우아하게 앞으로 던졌다. 동작 초기에는 손마디들이 모두 붙은 상태였으나, 마지막 순간에 두 팔이 떨어지면서 두 손바닥도 활짝 펼쳐졌다. 

 그렇다. 여러분의 기억은 정확하다. 앞 장에서 '뭔가' 하고 싶다고 말할 때 로라가 바로 그런 몸짓을 했다. 그 사황을 돌이켜 보자. …

 베티나와 로라의 그 몸짓을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 명명하자. 큰 불멸을 갈망하는 베티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길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작은 불멸을 희망할 뿐이지만, 로라 역시 같은 것을 원한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자신이 겪는 불행한 순간을 초극하여, 자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베티나와 로라의 불멸 속에서 괴테와 아녜스는 불멸하는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남을 것이다. 베티나는 괴테를 찬미했지만 또한 귀족 앞에서의 모자사건처럼 괴테를 우스꽝스러운 불멸로도 기억하게 만들었다. 불멸의 소송의 당사자가 된 괴테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괴테가 불멸이라는 법정에 대해 두려움에 떠는 헤밍웨이에게 이야기하는 구절은 <I'm not there>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쿤데라가 괴테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것은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미지 안에 보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괴테는 죽고 오직 그의 책들만이, 그의 유산만이 남을 뿐이다. 물론 괴테는 모두가 그 뒤에 남을 이미지에 대해서 신경쓴다는 인간적인 실수는 인정한다. 쿤데라가 그리는 괴테 역시도 그런 실수로부터 벗어날 순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소송이 괴테 그 자신에게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괴테는 노발리스가 이야기하는 완전한 비존재의 '관능'으로 잠들기를, 그래서 바보같은 불멸의 소송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죽음, 불멸없는 죽음은 쿤데라에게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것의 반대는 관념적인 죽음, 시인이 꿈꾸는 위대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뒤로 남긴다는 사실에 아녜스는 질색하고 로라는 매달린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 아녜스는 폴이 그녀에게 다가오기 전에 더 빨리 죽기를 소망한다. 반대로 로라는 연인의 별장에서 죽기로, 자신의 육체를 연인에게 온전히 바치고 가기를 소망한다. 카프카는 자신의 모든 글을 불태우라고 유언하고 미테랑은 홀로(그러나 역사와 함께) 팡테온을 순례한다. 내 생각으로는 밀란 쿤데라가 옹호하는 지점은 철저하게 전자이다. <호모 센티멘탈리스>에서 쿤데라가 비판하는 지점은 기독교 유럽은 '사랑'을 통해 자아의 소유권을 효과적으로 침해하는 방식을 발전시켜왔다는 것이다. 개인의 사랑과 감정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이해되고 준수되어야할 것들을 어기는 유죄를 너무나 쉽게 무죄로 만든다.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숭고한 감정에 고양된 사람들은 원을 그리고 날아오른다. 쿤데라가 고발하는 전체주의의 방식은 이렇게 원을 그리고 날아오르며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가리시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라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베티나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것인 무언가를 뺏고 소유하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이런저런 이름으로 타인을 재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편하게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은 사랑의 이름으로 벌어지곤 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사랑, 민중에 대한 사랑, 질서에 대한 사랑 등등…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쉽게 재단하는 것이 부정의하다는 지점을 지적한다. 왜 프롤레타리아와 애국자들을 사랑하고 예술에 정통한 베티나야말로 괴테의 사랑에 어울리고 실제로는 자신이 프롤레타리아였고 누구보다도 괴테에게 충실했던(특히 육체적으로) 크리스티아네는 역사에서 이름을 남기지 못할까. 그것이야말로 폭력이며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을 (강변하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은 물론 아니다) 『불멸』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읽으니 소설을 팸플릿 읽듯 읽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불멸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1-11-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쿤데라 전집 07 불멸소설 속의 소설이요 가장 슬프고 에로틱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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