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인생의 얼굴이 궁금할 때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은 나를 보며 웃고 있을까, 나를 좋아할까, 나를 미워할까, 엄숙한 표정일까, 아니면..

시간과 역사, 그리고 인생에 대해 선한 의지와 심판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 언젠가는 내 생의 정의란 실현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록 지금은 내가 여자가 없지만, 비록 내가 지금은 돈이 없지만, 비록 내가 지금은 지식이 없지만, 비록 내가 지금은...

내 인생이라는 시간은 나의 미덕을 기억해줄 것이고 마지막 날에는 그 미덕에 걸맞는 선물을 내게 선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공평무사한 심판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에티우스, 마키아벨리, 볼테르, 헤겔, 그리고 쿤데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필가들에게 시간과 역사는 그리 공정하지 않고, 때론 악하며, 가끔은 인간에게 무관심한 장난꾸러기로 보일 때도 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시간의 장난질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디 앨런은 시간과 운명이 우리 인생에 치는 장난질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감독이다.

그의 2005년작 매치 포인트를 보면서 이 "장난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부터 우디 앨런의 매시지는 너무 명확해서 여기서 더 이야기할 게 없다. 우리는 이런 상황들이 싫든 좋든 어쨌든 운의 영역을 벗어날 수는 없다.

공이 넘어가면 우리는 성공하고, 공이 넘어가지 못하면 실패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성공하길 원하지만, 그래서 넘어가라! 막 마음 속으로 외쳐보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영리하고 승부욕에 불타는 청년 윌튼에게 강한 스트록을 날릴 기회가 찾아온다. 레슨에 찾아온 톰 휴잇을 통해 윌튼에게 상류층으로 올라갈 기회가 찾아온다.

영국처럼 계급이 분명한 사회에서, 아일랜드에서 온 테니스 강사에게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은 것이다. 아니 전적으로 "운"이다. 갑자기 운명이 그에게 미소를 보낸다.



톰 휴잇의 동생 클로이는 윌튼에게 빠져들고 윌튼은 이것이 놓쳐서는 안 될 기회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톰의 약혼녀 노라가 윌튼의 욕망을 사로잡는다. 가난하고 박복한 배우인 노라에게 윌튼은 "너무 공격적인" 플레이를... 하지만, 자신의 처지에 수긍한다.

욕망을 따랐을 경우 그가 갖고 있는 자그마한 성공의 실마리는 놓쳐버릴 것이다.



인생엔 운이 중요한걸까, 노력이 중요한걸까. 어쨌든 운을 타고난 사람들은 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행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윌튼과 노라는 운이 얼마나 끔찍하게 인생을 좌우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윌튼은 그 운을 휘어잡기 위해 노력하고, 운이 따라준 모양인지(아니면 능력이 있는지도? 그러나 운을 휘어잡는 것도 마키아벨리를 빌리면 하나의 능력이다) 승승장구한다. 그에 비해 노라는 일종의 체념에 빠진다. 그녀는 자신이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스칼렛 요한슨이 얼마나 많은 운을 휘어잡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재밌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윌튼은 계속 노라에게 끌린다. (혹은 이것도 윌튼의 공격적인 승부욕일지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명함도 건내준다. 과거에 코트에서 항상 꺾었던 친구라서 그런지 살짝 불꽃튀긴다. 휴잇은 "여자를 잘 만났지"라고 쿨하게 이야기하지만, 그에겐 복받은 자로서의 자신감이 충만하다. 바운드가 조금 더 다르게 튀었더라면 휴잇은 저 남자가 되었을지도, 애거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사랑하는 클로이와 결혼도 해서 으리으리한 집도 가진다. 애도 낳자는 이야기도 하는데...



 갑자기 찰리 삼촌(자꾸 스토커 생각나서..)이 노라와 헤어졌다는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을 전한다. 사실 찰리 삼촌같은 남자에게는 노라같은 여자는 별로 대단하지도, 잘 어울리지도 않는 것이다. 이제 노라에게 이어진 성공에의 끈은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노라를 탐하던 윌튼은...




 우연한 기회로 노라와 재회해서 위험한 이중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붙잡히는 법, 노라는 점점 윌튼에게 독점적인 관계를 요구하게 되고 아내인 클로이 역시도 그와의 임신을 바라고 있다. 윌튼은 그의 승부욕과 운으로 많은 것들을 쟁취했지만 그것들을 모두 가질 수 없음을 점점 인식하게 된다. 노라를 선택한다면 클로이를 포기해야되고, 사랑을 택한다면 부와 명예를 포기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라가 임신을 하고 만다. 이제는 클로이가 주는 사랑과 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인의 회사가 주는 미래의 성공은 노라와는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주도면밀한 윌튼은 노라와 그의 관계를 아는 앞집 아주머니를 살해하고 마약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약과 귀금속들을 훔치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들을 통해서 강도로 위장하려는 그의 의도가 성공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왠걸, 갑자기 경찰서로 찾아오라는 전화가 오질 않는가.



혹시나 싶어서 템즈강에다가 증거인멸하기... 그런데...



반지 하나가 네트에, 난간에 걸려버리고 만다. 



알고 보니 노라의 일기장이 있었던 것. 거기에는 윌튼과의 애정행각들이 담겨있고, 윌튼은 강력한 살인용의자가 되고 만다.



착잡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노라와 옆집 노파의 유령이 찾아온다. 그는 노라에게 자신이 그녀를 죽일 수 밖에 없었음을 강변한다.

그렇다면 옆집 노파는? 윌튼은 도스도예프스키를 인용한다. "모두에게 최선이다." 그것이 "모두에게 최선이다." 물론 망자들에게 그런 말이 통할리 없다.

그들은 윌튼에게 댓가를 치를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마 댓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히 정의로울 것이다.

그런데...




기막힌 우연으로 윌튼은 혐의를 벗게 되고 클로이는 윌튼의 아이를 순산한다. 윌튼은 성공했고, 아마 성공할 것이다.


이 결말은 정의롭지 못 하다. 우리 모두는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윌튼에 대해서 아마 도덕적으로 비난할 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말은 단지 윌튼의 것인가? 죄는 단지 윌튼에게 있는가? 윌튼의 죄를 묵과하고, 오히려 죄인을 더 흥하게 만드는 운명은 죄가 없는가?

이 결말로 인해 다음과 같은 주장이 반박된다고 생각해보자.

"죄인은 벌을 받는다." 이 주장에는 필연성이 전제되어 있다. 우디 앨런의 생각을 따르면 "죄인이 벌을 받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어떤 부도덕한 주장을 정당화하진 않는다. "죄인이 벌을 받지 않을수도 있다."는 "세계는 부도덕하며, 악으로 가득차있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진 않는다.

분명히 우리는 윌튼의 행동이 옳지 않았다는 점과 윌튼에 대한 운명의 처사가 공정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선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짧은 원리들로부터 우리가 얻는 결론들은 다음과 같다.

어떤 도덕이나 정의보다도 우리가 세계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은 "우연성"이다. 죄인의 성공은 그저 우연성에 불과하다. 이 세계에는 인간을 넘어서는 판관같은 존재는 없다.

만약에 우리가 세계에서 인간 외에 무엇인가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연성"의 여러 모습들일 뿐이다. 공정하며 때로는 잔인하고 때로는 어리석고 때로는 맹목적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연성에 대한 인식밖에 없다면, 윌튼에 대한 단죄는 단지 우리의 몫이며, 우리에게 근거했을 뿐이라는 점도 명확해진다.

세계는 도덕적이다, 혹은 부도덕적이다 라고 찬미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다. 우리의 정의는 우리가 우연들로 가득찬 역사를 통해 만들어온 것일뿐이다.

우리는 단지 우연히 생성된 정의에 대한 기준들을 통해 윌튼을 비판하고, 우연성을 넘어서는 어떤 윤리들을 제시한다. 그런 지점에서만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디 앨런이 보여주는 "운명의 장난질"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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