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좀 더 좁게 접근하자면 현대의 학문체계에서 비조들은 짠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스승은 있었다. 어떠한 대가라도 누군가에게는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공부하여 자신의 것으로 습득하는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지식이 애초에 외재하기 때문에 지식을 습득하는 관계는 애초에 의존적일 수 밖에 없다. 지식을 습득하는 가장 자의적인 방식인 깨달음조차도 그렇다. 예수가 기독교의 진리를 갈파하는데는 유대교, 특히 에세네파의 제기가 필요했고 그것을 표현하는데는 그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지만 유대교의 표현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부처는 육도학파의 도전이 필요했고 맑스는 헤겔과 고전경제학이 필요했다. 한 학문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원을 짬뽕한 곳에서 +a가 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비조에 대한 경외는 그의 업적을 최대한 쓸모있게 이용하는 데 있다. 숭배하는 자세보다 최대한 영악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소화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스스로의 제일 윗 스승에게 보은하는 길이다. 맑시즘을 예로 들자면 공산주의의 관변학자들은 결국 숭배의 늪에 빠졌지만 맑시즘의 혁신은 신자유주의 유럽에서 나왔던 것이다.

사회과학에서 하나의 전통은 유일의 전통이 되고자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게임의 법칙을 제시하고 그 게임이 어디까지 적용되는가 무한한 실험을 통해 그 정당성을 확립하고 참여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더 많은 구성원들이 패러다임에 합류하게 만든다. 하지만 저변을 넓히기 위해서는 그 패러다임이 어느 순간 뚝딱 만들어진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고 마치 자연법칙처럼 어느 시대에도 진리였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과거의 비조들은 다시 그 전통의 비조로 부활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또는 반대로 이제 사라진 전통의 비조들은 지나간 유행이라는 단어로 학문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고전을 공부한다면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도 학문공동체 안에서 큰 효용을 얻게 되는데 이를 알아보자. 처음으로 생각해볼 경우는 학습자가 주류 패러다임에 속해 있거나 이에 좀 더 다가가는, 혹은 패러다임의 핵심이나 상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경우이다. 고전은 패러다임이 도달하고자 하는 위치를 보다 단순한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패러다임의 목표에 보다 친숙한 '태도'를 갖추게 해준다. 또한 패러다임 내에서 고전은 하나의 이상향이기 때문에 고전에 친숙한 그는 낙원에 가까운 이라는 권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한 목표를 둔 학문공동체 안에서 목표가 또렷한 자는 '착한' 이일 수 밖에 없다.

반대로 패러다임을 반하고 그것의 이상사례를 검증하려는 이라면 고전의 이단적인 부분을 공부함으로써 정론을 논박할 수 있다. 패러다임과 사상가의 수적인, 시간적인 불일치는 필연적으로 둘의 관계가 동일한 범주를 가질 수 없게 만든다. 고전은 현재의 패러다임에서 이단적인 부분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불일치가 가져오는 긴장을 통해 패러다임의 약한 부분을 논박할 수 있고 또한 그 시도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학습자가 패러다임을 반하는 경우에도 고전은 그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학문이 구성되었다는 입장을 따르면 고전은 따르는 자, 반하는 자, 그 모두에게 좋은 무기가 된다. 나는 그래서 잘 배우기 위해서 고전을 읽고, 반항하기 위해 고전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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